시베리아의 신흥도시 나홋카 항만의 거대한 환영을 벗어나 우리는 다시 혁명의 성지, 파르티잔스크(옛 지명 수찬, 한자어로 水淸) 시가지로 돌아왔다. 장대한 시호테알린산맥의 끝자락 파르티잔스크는 산지에 둘러싸여 있으나, 주변 대지는 광활했다.

김경천의 투쟁 기록에는 수찬 지역을 내수찬, 외수찬으로 구분하고, 치모우, 다우지미, 적양촌, 니콜라예프카 등 다양한 지명이 자주 언급된다. 발해성이 있었던 니콜라예프카(신영동)를 제외하면 현지 안내자도 잘 알지 못하는 지명들이었다. 우리는 시가지 지역이 내수찬이고, 우리가 머문 농촌 외곽 지역이 외수찬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었다.
1864년, 조선의 부패한 조정의 박해와 기아를 피해 함경도인들이 밀입국하기 시작했다. 한인이 집단 거주했던 지역은 초기에는 두만강 경계지대 포시에트 지역이었지만, 이후 북쪽으로 농토를 찾아 확산되었다.
19세기 초에는 연해주의 수도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하르빈행 교통이 편리한 교통 요지 우수리스크(소왕영) 시, 우수리스크에서 소만 국경에 접한 농업지역 수이푼(추풍)으로 대이동을 한다. 그리고 우리가 머물고 있는 블라디보스토크 동쪽 150km 떨어진 산촌 파르티잔스크(수청)에도 진출하였다. 이 외에도 진취적인 고려인들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아무르주의 수도 하바롭스크로 모여들었다.
이 동토의 타이가 지대, 불모지였던 연해주와 아무르 지역을 초기의 고려인 이주자들이 개발하고 발전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해주에는 원주민인 여진족, 나나이족(말갈족)이 극소수 수렵과 어로에 종사하고 있었고, 소수의 러시아 군인들만 국방 목적상 국경지대에 주둔하였다. 토지 개발과 생산, 노동 등 경제활동에 종사한 인력은 전부 1863년 이후 밀입국한 한인(고려인)이었다.

파르티잔스크시는 우리의 군청 소재지 정도의 작은 농촌시였다. 시청사 건물도 마치 공장 건물처럼 사각형으로 무미건조하며 투박하다. 극한 추위를 피하기 위한 습관이 붙어 있는지, 건물 입구는 어느 곳이나 출입문이 꽁꽁 닫혀 있다. 공산주의 체제를 겪으면서 획일적 국가 통제가 미친 영향이 유령처럼 사회 곳곳에 잔존하고 있다고 보면, 그건 여행자의 편견일까?
그나마 문이 열려 있는 곳은 단 한 곳, 러시아 정교회 건물뿐이었다.

파르티잔스크 시청 옆 공원에는 비교적 커다란 기념탑이 하나 서 있다. 1918년부터 1922년까지 러시아 혁명 내전에서 산화한 영혼, 빨치산 동지들을 기리는 탑이다. 러시아 전역에는 이와 같은 유형의 기념탑과 레닌의 동상이 설립되어 사회주의 혁명을 기리고 있다.
특이하게도 어느 도시에서도 스탈린 동상은 본 적이 없고, 레닌 동상만이 보전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권한을 남용한 무자비한 독재주의자와 진정한 사회주의자의 차이가 아닌가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1919년 말, 일본 육사 출신 기병 장교 김경천이 중국 하르빈에서 열차로 이동하여 러시아에 입국한 후 최초 도착지는 우수리스크였다. 우수리스크에서 1920년 3월경, 이곳 파르티잔스크(수찬) 외곽 고려인 부락으로부터 군사 교관으로 초청받아 이동해 왔다. 그리고 고려인 부락을 약탈하는 마적단 소탕을 위해 지역 청년들을 훈련시켜 큰 공을 세우고, 러시아 혁명세력으로부터 수찬 지역 군정관으로 인정받는다. 반혁명군(백군)을 돕는 일본군과의 전투는 주로 이곳에서 공방전이 벌어져 그의 명성이 쌓이는 곳이다.
연해주 고려인 거주지 중 게릴라전에 가장 유리한 곳이 시호테알린산맥에 안겨 있는 분지 지형의 파르티잔스크(수찬)였다. 파르티잔스크 니콜라예프카에는 원래 제정 러시아 보병 장교 출신 고려인 유격대장 한창걸(1892-?)이라는 뛰어난 군사 전략가가 있었다. 여기에 일본 육사 출신 기병 장교 김경천이 합세했다. 보병과 기병 전술이 조화되었다.

지역을 관통하는 찌그로바강과 산악의 험준한 지형은 일본군이나 반혁명군(백군) 등 외부 병력이 장기 주둔할 여건이 되지 못했다. 넓은 농토에 고려인 동포들이 일찍 정착하여 군비 충당이 양호하고, 주민들의 방어 의지가 강해 병력 충원이 수월하였다.
일본군 대규모 병력이 출동하여 소탕작전을 전개하면, 게릴라 부대는 주변 산악으로 도피와 후퇴 작전하기에 유리하였다. 이런 공방전 속에서도 지역의 관할권은 실질적으로 김경천의 고려인 부대에게 장악될 수 있었다. 김경천은 군자금 갹출 때문에 고통받는 농민을 위해 군대가 스스로 경작을 하는 둔전 제도를 운영했다.

합리적인 군정은 매우 효율적이어서 지역 농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수찬 지역의 군정을 연해주 고려인 자치 모델로 하자는 사회주의 혁명가 김 아파나시(1900-1938) 같은 인물들이 연해주에 생겨날 정도였다.

그러나 사회주의 혁명 계급투쟁을 앞세운 러시아 혁명투쟁에서, 조국 독립을 우선시하는 민족주의자들은 설 입지가 없었다. 1922년 이후 김경천 부대 등 모든 독립군의 무장 해제와 활동 금지령 이후, 그 흔적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더구나 1937년 스탈린 정권에 의한 고려인 강제이주 이후, 지역은 공동화되거나 러시아의 국영농장화돼 버렸다. 1990년대 초까지 수찬 지역 고려인의 자취는 역사 속의 미아였다.

1990년대 들어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고 러시아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이들의 고려인 독립운동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일까? 다시 모인 고려인 후세들과 한인 유지들이 뜻을 모았다. 시가지 한구석에 무명의 한국인 독립투사들을 추모하는 작은 추모비가 별도로 세워졌다. 러시아어로 쓰여 있고, 한글로 번역되어 있었다.
비문의 명칭은 “러시아 적백내전(1918–1922) 때 대한독립을 위해 항일운동에 참가한 한인들을 기념비”이며, “이 기념비를 항일운동에 참가한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 바침”이라고 각인되어 있었다.
비문은 파르티잔스크 시당국의 허가를 받은 시가지 작은 공원용지에 공식적으로 세워진 것이다. 이 비문을 허용한 진정한 취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인 민족주의자들의 항일 독립투쟁이 공인되고 있음은 그나마 다행이라 할 것이다.

이 비 속의 한인 독립운동가 중 으뜸가는 인물은 단연 “백마 탄 장군 김경천”일 것이다.
이 망각의 인물을 찾아 내일은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