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여 애국선열들이 모셔진 리들리 묘역으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한흥수 친구가 선열들에게 바칠 소형 태극기를 준비한 것을 알았다. 한인 묘역에 바칠 작은 태극기 깃봉을 들고 가는데 재미중가주해병대전우회/중가주애국선열추모회 김명수 회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86세 김명수 회장의 안내를 받아 태극기를 한인 이름의 묘지에 꽂아나갔다. 리들리 한인사회를 이끌었던 김형순과 그의 부인 한덕세의 묘가 눈에 띄었다.
경남 통영 출신으로 배재학당을 졸업한 김형순은 영어에 능통해서 1903년 하와이로 떠난 한인 이민자의 통역관 겸 인솔자가 되었다. 그는 1906년 미국 본토로 이주하여 로스앤젤레스 고등학교를 졸업 후 1909년 귀국해 이화학당 졸업생인 전북 정읍 출신 한덕세와 결혼했다. 김형순은 1913년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1916년 리들리에 정착하면서 묘목회사를 설립하고 과수원도 경영했다. 1917년 리들리에 도착한 한덕세는 김형순의 사업을 돕고자 가사도우미 등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음악강습소를 운영하며 피아노와 성악도 지도했는데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한덕세의 헌신적인 활동은 김형순의 사업에 재정적 원천이 되었다.
1921년경에 김형순은 한덕세의 이화학당 스승인 김호와 동업으로 김형제상회(Kim Brothers Company)를 차렸다. 김형순 50%, 김호 25%, 한덕세 25% 지분이었다. 김형제상회는 과일을 수확하고 포장하고 도매로 판매했는데, 한인(방학 중에는 한인 유학생까지)이 일할 수 있는 노동주선소인 캠프(Camp)도 함께 운영했다. 털 없는 복숭아 넥타린(Nectarine)을 개발해 만든 신종 넥타린 상표는 미국 전역으로 보급되어 김형순은 ‘백만장자’가 되었다. 김형제상회는 한인사회를 발전시키고 대한인국민회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미군납으로 더 많은 돈을 벌었다.

김명수 회장의 쉼 없는 안내를 받으면서 묘역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과일 농장에서 힘들게 번 수입의 큰 몫을 상해임시정부에 아낌없이 바친 리들리 한인사회를 그려보았다. 얼마 전까지 일부 후손들이 찾았으나 이제 100% 무연고 묘지가 되었다는 김명수 회장의 설명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리들리 묘역을 떠나기 앞서서 김명수 회장이 사비와 또 후원을 받아 제작해 세운 16개 대리석 벤치들이 너무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면 하단에 한반도 지도와 각종 문구, 상판에 태극기를 새긴 대리석 벤치. 50년 사용하기로 하고 땅을 구입, 세웠기 때문에 “50년간 한국 땅이다”라는 김명수 회장의 힘찬 말씀이 리들리를 떠나 LA로 돌아오는 내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독립운동가 손영권과 캘리포니아에 사는 외손자

2024년 3월 LA에 사는 한흥수 친구가 연락해 근황을 들려주었다. 외조부의 삶을 찾아 독립운동가 집안임을 확인하라는 모친의 유훈을 3년 전에 돌아가신 누나인 원불교 선타원 한제선 종사로부터 듣고, 매년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고향 정읍과 외가인 부안, 또 관계기관 등을 찾아 외조부의 삶을 찾아 나사고 있다고 했다. 외조부 孫永權이 金相述(2008년 건국포장), 金邦旭 등과 전북 부안에서 조선 독립을 도모하고자 1920년 5월 상해로 망명한 후 1921년경 귀국해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 유예 3년형 판결을 받았다는 전주지방법원 자료도 나왔다고 했다.
1930년대 초반 손영권은 가족과 함께 만주 錦州省(현 요녕성) 盘山縣에 거주하다 해방 후 귀국해 고창 선운사에서 승적을 취득하고 불교에 귀의했다. 한흥수 친구는 2023년 2월 자료를 취합해 손영권의 서훈을 신청했다. 그러나 1942년의 만주국 관리록에 같은 이름의 경찰이 있다는 사유로 ‘보류’로 결정되었다. 다시 2024년 2월에 외조모의 사망신고 호적기록(1942년)에 나와 있는 요녕성 거주지가 경찰이 근무했다는 흑룡강성과는 1,000km 이상 떨어져 있어 동명이인일 수밖에 없다는 의견, 또한 성철스님 일대기에 나오는 손영권과의 교분 증거 등을 제출해 재심을 신청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같은 사유로 ‘보류’로 결정되었다. 만주국 흑룡강성 경찰관리(친일행적)로 나오는 손영권이 동명이인임을 증명하는 ‘서류를 제출해야 했다.’
중국 경찰(공안국)의 문서고를 열람, 확인, 복사하는 것은 기밀 사항이기 때문에 외국인은 접근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마침 “만주지역에서 활동한 전북 출신 독립운동가 연구” 논문을 쓴 원광대 김주용 교수가 만주국 당시 경찰 인명 조사를 해야 하는데 민족문제연구소 자료를 찾아보겠다고 했다.
현재 국가보훈부는 유족인 신청자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참여 자료를 입증하게 하고 있다. 그런데 만주국 시절(중국 자료)의 경우는 우리 정부가 나서주어야 하지 않을까?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은 이제 영원히 사라져야 합니다. 국가와 공동체를 위한 희생이 합당한 보상으로 돌아오는 나라, …” 이재명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의 울림이 적극적인 보훈 정책으로 구현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