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나 성숙했는지 증명한 순간이었다.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쟁취한 것이다. 6개월의 산고(産苦) 끝에 탄생한 새 대통령! 이 모든 중심에 그들이 있었고 그들의 희생이 있었다. 국민이다.
군사독재를 경험하지 못한 대한민국의 60세 이하 젊은 세대가 민주주의를 지켰고 국회로 달려가 맨손으로 군(軍)을 막아선 이들의 용기는 국민의 마음을 움직여 ‘공동운명체’를 만들었으며 마침내 국회의 계엄 해제와 대통령 탄핵에 이어, 21대 대통령을 탄생시켰다.
캐나다 정신분석학자 존 맥커디 박사는 “폭탄이 떨어졌을 때 공동체의 사기(士氣)는 생존자의 반응에 달렸다”고 했다. 물론 사망자가 있고 부상자가 있지만, 폭격을 피한 사람들은 “그 무엇도 자신을 해칠 수 없다는 ‘자신감과 흥분’을 느낀다”고 주장했다.
그랬다. 계엄의 공포 속에서도 존엄을 지키기 위한 ‘공동체’가 생겼다. 폭탄 공격에도 오히려 차분해진다는 심리에서 나온 ‘국민의 흥분과 자신감’이 오늘날 새 대통령을 뽑았고 빼앗긴 민주주의를 되돌려 놨다.
보는 능력을 앗아가면 듣는 재능이 발달하듯, 힘을 동원해 인권을 유린하는 악행을 저질러도 사람들에겐 악행에 대응하는 ‘공동체가 생긴다’는 것을 80년대 당시, 주먹밥을 나눠 먹던 아카시아꽃 아래서, 그리고 12·3 계엄을 통해 체험했다.
계엄 넘어 국민 통합의 길로
“우리에게 빵을 달라, 그리고 장미도 달라” 1908년 미국의 여성 노동자 1만5천여 명이 뉴욕시위에서 주장한 구호다. ‘빵’은 생존권이고 ‘장미’는 인간의 존엄을 상징했다. 이들이 외친 ‘빵과 장미’는 당시 미국 국민의 갈망이었고 이 갈망이 시대적 상황을 만나 집단으로 표출되면서 삶의 가치를 높이는 변곡점(變曲點)이 됐다. 그 시절 빵과 장미가 지닌 진정성은 117년이 흐른 지금 “대한민국의 21대 대통령선거가 ‘장미 대선’으로 희망을 향하는 변곡점”이 돼야 할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물론, 교인들을 세워놓고 “좌우로 정렬. 대가리를 박는다. 실시!”하면서 인권을 말살한 목사 “저런 못된 사람이 끝까지 설치는데도 괜찮을까?”라는 찜찜함도 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재료라도 믹서기에 넣고 갈면 맛있는 음식이 되듯” 이제부턴 마음을 모으는 통합의 믹서기를 작동시켜 모두가 살맛 나는 대동세상을 여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그 선두는 아름다운 ‘장미’와 풍요로운 ‘빵’을 선물하는 지도자, 직무 첫날이 새 희망을 찾아가는 ‘변곡점’이라는 신호를 국민에게 전하는 대통령이어야 한다.
국민이 지켜낸 민주주의 사수, 대통령 책무
그러기 위해 새 대통령은 ‘복원력’(復原力)을 발휘해 상처 입은 국민의 마음을 본디 상태로 되돌려 놔야 한다. 윤석열 정권 내내 “힘들었다”는 소상공인의 활로와 서민들의 민생고 해결이 우선이다. 변혁(變革)은 집권 초기가 속도감 있게 매달려야 할 ‘골든타임’이기에 지금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필요한 건 앙갚음이 아니라 다윗의 지혜와 용기다.
2m가 넘는 블레셋군의 거인 골리앗이 철갑으로 무장 했을 때 겁먹은 것은 이스라엘군이었다. 이때 골리앗의 상대로 나선 이가 바로 양치기 소년 ‘다윗’이다. 이 싸움에서 돌에 맞아 쓰러진 골리앗이 참수당하는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다윗의 블루오션이다. 생명과 직결된 뇌가 있는 이마를 명중시켜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은 다윗의 용기와 지혜였다.
용기와 지혜는 다양성(多樣性)에서 나온다. 목소리를 내는 국민도, 침묵하는 국민도, 불가능해 보이는 주장을 하는 국민도, 국민 각자는 자신의 방식대로 ‘빵과 장미’를 가질 자유가 있다. 이것이 간과되면 다양성이 휘발된다. 하지만 자식들이 볼 수 있고 국민이 보는 장소에서 어른들을 원산폭격 시키는 못된 목사의 인격 모독행위는 장미(인격)를 짓이긴 반인륜적, 막가파식 행동이기에 결코 용납돼선 안 될 일이다.
실패한 역대 지도자가 원하는 걸 얻지 못한 이유는 ‘힘에는 한계가 존재함’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격을 무시한 힘, 다양성을 지배하는 힘, 그리고 정당성이 부족한 힘은 존엄의 대상이 아니라 저항으로 이어진다. 이는 살아 있는 우리가 증인이다.
2025년 6월, 대한민국 국민은 변곡점에 서 있다. 골리앗과 양치기 싸움에서 보듯 힘을 가진 자, 최고 권력자에게 관심이 가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세상의 아름답고 가치 있는 많은 부분은 다양성과 상상을 뛰어넘는 절박(切迫)함에서 나온다. 우리의 지난 6개월은 “불가능한 일에 기적이 일어나 가능했다”가 아니라 “불투명한 예측 불가가 절박함으로 나타났기”에 버틸 수 있었다.
이제 선거는 끝났다. 승자의 환희 속에 패자의 부자유스러움도 보인다. 각자 본인이 서 있는 위치에서 보면 기쁨이 있고 상상 초월의 서운함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국민의 그 위치는 “함부로 넘볼 수 없는 가치” 또 다른 간절함과 절박함이 존재한다.
그래서 새 대통령에게 묻는다. 2024년 12월 3일 ‘계엄선포’ 그 시각, 그날 밤과 같은 절박함이 여전한가? “응답하라” 계엄군을 몸으로 막고 눈물로 호소했던 그 절박함! 공포에 휩싸여 분노의 기도로 밤을 새운 그날, 그 국민이 그토록 바라던 ‘장미’와 ‘빵’이 준비 돼 있는가를 묻고 있다. 지금부터는 억하심정의 쪼잔함을 덮고 새로운 각오로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힘을 쏟으라”. 이는 국민의 명령이다.
제목이 너무 공감 갑니다 !
우리의 선택이 후회가 되지 않기를
국민의 ‘생존과 존엄 ’ 을 보장하기를
정치혼란에 마침표를 찍고 민생과 경제가 회복되어 안정되길
국민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잊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