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레이시아는 다민족·다종교 사회로서, 말레이 무슬림 다수를 중심으로 중국계 불교도, 인도계 힌두교도, 기독교인 등 다양한 종교 공동체가 공존하고 있다. 이러한 다문화 구조는 말레이시아 민주주의의 기회이자 도전이며, 종교 간 조화는 국가 통합의 핵심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5월 30일 한국외대 오바마홀에서 열린 ‘글로컬 시대, 다문화사회의 종교 화합과 관용’ 국제학술포럼에서 말레이시아의 종교학자이자 개신교 목사인 헤르멘 샤스트리(Hermen Shastri) 박사는 “말레이시아는 하나님의 이름 아래 종교 간 평화를 실천해온 국가”라며, 루쿤 느가라(Rukun Negara)와 말레이시아 마다니(Malaysia Madani) 정책을 중심으로 종교 간 공존의 제도적 기반을 소개했다.
헤르멘 샤스트리 박사는 세계교회협의회(WCC) 및 말레이시아기독교협의회(CCM, Council of Churches of Malaysia)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온 에큐메니컬(ecumenical) 운동가로 말레이시아의 종교 간 평화 공존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그는 “루쿤 느가라는 단순한 국가 이념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영적·도덕적 언어이며, 말레이시아 마다니는 포용과 자비, 존중의 가치 위에 세워진 민주적 공존의 미래 모델”이라고 말했다. 또한 “종교 간 갈등을 해결하는 데 있어 정치가 아닌 시민사회와 종교 간 대화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1969년 말레이시아에서는 인종 간 폭동(5·13 사건)이 발생하면서 사회 통합과 조화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는데, 이를 계기로 1970년 발표된 것이 바로 루쿤 느가라다. 이는 다섯 가지 원칙을 포함한다. 즉 △신에 대한 믿음 △왕과 국가에 대한 충성 △헌법의 숭엄성 △법의 지배 △예절과 도덕성 등이 그것이다.
말레이시아 헌법은 제3조에서 이슬람을 연방의 종교로 명시하고 있지만, 제11조에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1988년 개헌을 통해 샤리아 법원이 민사법원과 병존하게 되면서, 이중적인 법체계가 형성됐다. 대표적인 사례인 ‘리나 조이 사건’(2007)은 이슬람 개종의 자유를 둘러싼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현재까지도 말레이시아의 종교 자유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이어지고 있다.
2009년 나집 라작 총리가 제시한 ‘1Malaysia’는 ‘국민 우선, 성과 우선’을 기조로 다양성 속의 통합을 지향했지만 곧 한계를 노출했다. 이에 반해, 2023년 안와르 이브라힘 총리가 도입한 ‘Malaysia Madani’는 지속가능성(keMampanan), 번영(kesejahteraan), 혁신(daya cipta), 존중(hormat), 신뢰(keyakinan), 자비(ihsan)라는 여섯 핵심 가치를 중심으로 윤리적이고 인도주의적인 국가 운영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일부 지역에서는 활동 제한과 복장 규제 및 서적 금지 등을 통해 종교 자유를 제약하고 있으며, 이슬람 국가 정체성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도 지속되고 있다. 중도 이슬람을 지지하는 정부와, 보다 보수적인 신정국가 모델을 주장하는 야당 간의 긴장은 세속 헌법 구조와의 충돌로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레이시아는 시민사회와 종교 지도자들의 노력과 법률 개혁 시도, 그리고 종교 간 대화를 통해 평화공존의 가능성을 넓혀가고 있다. 루쿤 느가라와 말레이시아 마다니는 이러한 공존의 제도적 틀로서, 미래형 다문화사회의 표본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여주고 있다.
헤르멘 샤스트리 박사는 “말레이시아의 종교 공존은 단순한 수용이 아니라, 신뢰와 자비를 바탕으로 한 적극적 협력의 문화”라며 “아시아 각국은 말레이시아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고, 종교를 분열이 아닌 평화의 자산으로 삼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번 포럼은 한국이슬람학회, 불교학연구회, 성공회대학교 신학연구원 공동 주최로 열렸으며, 다문화사회 속에서의 종교 간 협력과 관용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