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제외하면 역대 월드컵은 모두 단일 국가에서 개최됐다. 그러나 2026년 월드컵부터는 본선 참가국이 32개국에서 48개국으로 확대되면서 개최 규모도 크게 커졌다. 이에 따라 웬만한 국가가 단독으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용 부담이 늘어났다. 2002년 한국과 일본의 공동 개최에 이어 이번 대회는 미국·캐나다·멕시코 3개국이 공동 개최하는 첫 월드컵으로, 흔히 북중미 월드컵이라 불린다.
참가국이 늘어나면서 월드컵 본선 진출의 문턱은 다소 낮아졌지만, 반대로 상위 라운드 진출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조별리그를 통과한 팀들만이 32강 토너먼트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2026년 북중미 월드컵에서 한국은 체코, 멕시코, 남아프리카공화국과 같은 조에 편성돼 조별리그 3경기를 멕시코에서 치르게 됐다. 한국의 첫 상대는 체코였다. 1930년 첫 월드컵 이후 체코는 여러 차례 세계 축구 강국의 면모를 보여준 전통의 강호다.
필자가 처음 월드컵을 접한 것은 1970년 멕시코 월드컵이었다. 당시 체코와 브라질의 경기가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체코는 선제골을 넣으며 브라질을 위협했지만, 당시 사상 최강으로 평가받던 브라질에 결국 1대4로 역전패했다. 비록 졌지만 체코의 선제골은 어린 시절의 필자에게 체코를 강팀으로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한국과 체코는 그동안 여러 차례 맞붙으며 팽팽한 승부를 펼쳐 왔다. 특히 2001년 거스 히딩크 감독 부임 초기 한국이 체코에 0대5로 완패한 경기는 많은 축구 팬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 당시 히딩크 감독은 ‘오대영’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러나 그는 이후 한국 축구의 체질을 바꾸며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를 일궈 냈고, 그 패배는 결국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1970년대 한국 축구는 말레이시아 메르데카컵과 태국 킹스컵 우승 소식만으로도 국민적 환영을 받던 시절이었다. 반면 일본은 일찌감치 세계 무대를 지향하며 아시아 무대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 나갔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하며 국제 경쟁력을 입증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대 한일전 전적에서는 오랫동안 한국이 우위를 유지했다.
이후 한국 역시 경제 성장과 함께 축구 수준이 높아졌고,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이후 월드컵 본선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2002년 월드컵 4강이라는 역사적인 성과를 이루었다.

체코와의 경기 전반전은 다소 답답했다. 한국이 점유율에서는 우위를 보였지만 양 팀 모두 결정적인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그러나 후반 들어 경기는 급격히 요동쳤다. 체코는 장신 선수들의 높이를 활용한 공격으로 선제골을 넣으며 앞서 나갔다.
하지만 한국은 흔들리지 않았다. 중원의 황인범이 동점골을 터뜨렸고, 최근 상승세를 보이고 있는 오현규가 역전골을 성공시키며 경기를 뒤집었다. 후반 77분경 체코가 다시 한 번 골망을 흔들었을 때는 패배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듯했다. 그러나 오프사이드 판정으로 득점이 취소됐고, 곧이어 오현규가 역전골을 터뜨리며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야말로 지옥과 천당을 오간 순간이었다.
득점 선수들뿐 아니라 손흥민을 비롯한 공격진은 끊임없이 상대 수비를 흔들었고, 김민재가 이끄는 수비진은 안정적인 경기 운영으로 버팀목 역할을 했다. 축구는 골을 넣는 것만큼 실점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골키퍼 김승규 역시 결정적인 슈퍼세이브를 여러 차례 선보이며 승리를 지켜 냈다.

경기를 보며 문득 옛 시절이 떠올랐다. 한국 대표팀 평균 신장이 지금보다 훨씬 작았던 시절, 한국 최고의 공격수들 가운데는 신장이 165cm에도 미치지 못하는 선수들이 적지 않았다. 포르투갈의 전설 에우제비오가 활약하던 벤피카가 내한했을 때 한국은 큰 점수 차로 패배하기도 했다. 당시 190cm에 가까운 장신 공격수들은 한국 수비수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한국 대표팀은 더 이상 신체 조건에서 크게 밀리지 않는다. 김민재를 비롯한 여러 선수들이 세계 정상급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체격과 체력, 기술 모두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장했다.
필자가 어린 시절만 해도 한국 청소년들의 평균 신장은 일본보다 작았다. 일본이 모든 면에서 앞서가는 나라처럼 보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한국 사회는 눈부신 발전을 이뤘고, 스포츠 분야에서도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다.
체코와의 경기에서 한국 선수들은 신장에서도 크게 밀리지 않았고, 체력과 기술 면에서는 오히려 우위를 보였다. 거의 세계 최빈국 수준이던 시절에 성장한 필자로서는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감회가 남다르다. 우리 세대가 후손들에게 조금 더 나은 나라를 물려주는 데 작게나마 기여했다는 생각에 뿌듯함을 느낀다.
이제 한국은 멕시코와 남아프리카공화국과의 경기를 남겨 두고 있다. 체코전 승리로 좋은 출발을 한 만큼 다음 경기들에 대한 기대도 커지고 있다. 축구는 실력만으로 승패가 결정되지 않는다. 때로는 운도 필요하다. 부디 행운 역시 우리와 함께해 16강은 물론 그 이상의 성과까지 이루기를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