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 탄 김장군’ 김경천, 일본군 장교에서 항일 독립운동가로
사직동 잣골의 숨은 영웅, 김경천의 삶과 투쟁

김경천(본명 김광서, 김영은 별칭 김응천 1888-1942 )은 1920년대부터 1930년대에 걸쳐 조선인들 사이에서 ‘조선의 나폴레옹’이라 불리었다. 그는 소련 연해주와 동만주의 소만 국경지대에서 전설적이었던 인물, 김일성 장군이라 지목된 유력한 항일무장 독립운동가였다.

해방 직후 평양에 북한의 청년 지도자 김일성(본명 김성주, 당시 33세 )이 소련군 장교 복장으로 나타나, 김일성 장군이라 소개할 때 사람들은 가짜 김일성 장군이라고 수군수군 됐다. 조선 사람들의 뇌리에는 김좌진, 홍범도, 김경천 같은 50-60대 관록의 독립투사가 김일성 장군으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서울 종로구 사직동 풍림-스페이스 본 아파트 2단지 북쪽 ‘김경천 집터’ 일명 ‘사직동 잣골’을 찾아 나섰다. 김경천이라는 이름도 낯설지만, 표지석의 위치도 왕래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기 어려운 외진 장소였다. 이 작은 표지석의 주인공 김경천은 이곳과 어떤 관련이 있고, 어떤 인물일까? 작은 기념관이나 기념사업회조차 없는 이 인물의 일생에 깊은 관심이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종로구 사직동은 사직로와 사직터널이 개통된 1967년 전까지는 인왕산 자락에 연결된 산기슭의 고급 주택가였다. 사직동 사람들은 조석으로 인왕산에 오르내릴 수 있었다. 김경천과 부인 유정화의 회고에 인왕산 푸른 소나무 이야기가 자주 언급되는 것은 그 까닭이다. 남쪽으로는 경희궁(옛 서울고등학교 자리) 북쪽담과 연하고 있으며, 한양도성 성벽이 서쪽을 막아 일본인들이 선호하는 주택지였다. 사직동 잣골이라 불렸음은 필경 잣나무가 많았을 터인데 현재는 그 자취를 찾을 길은 없었다.
김경천(초기 이름 김영은)은 구한말 집안도 넉넉하고 부친의 후광도 있는 중산층 관료의 자손이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23기, 1911년 임관)에 유학한 정통 장교출신으로 출세가 보장된 현역 일본군 중위였다. 남부럽지 않은 그가 일제에 순응이나 타협 출세의 길이 아니라 형극의 길, 무장독립군의 길로 나선 배경은 어떤 것일까?
김경천의 집안은 북청 물장사로 이름난 함경남도 해안가 북청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김정우)도 일찍이 개화된 군인 관료였다. 김정우는 하급군인으로 총명하고 책임감과 신의가 있었다. 출세 길이 막연한 함경도 향반 출신인 그는 1880년대 중반부터 후일(갑오개혁) 군부대신이 되는 개화파 윤영렬(윤치호의 부친)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윤영렬이 함경도 남병사(지역 사령관)로 재직 중 상하관계를 넘어서는 신뢰를 획득했다. 김경천의 아버지는 함경도 북청 사람답게 출세와 신분상승 욕구, 생활력이 강하고 이재에도 상당히 밝았다.
김경천의 아버지 김정우는 나이 서른아홉 살에 1895년 관비유학생으로 지원해서 합격한다. 집념이 대단히 강한 그는 동경에 가서 아들 또래인 일본학생들과 함께 중학교부터 다녔다. 큰 아들 김성은(김경천의 형)까지 대동하는 큰 혜택을 입었다.
김정우는 도쿄고등공업학교에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도쿄의 육군포병 공창에서 총탄과 포탄 제조과정을 이수한 무기 전문가가 되었다. 김성은도 일본육사에 입학해 예과 과정을 마치고 귀국해 대한제국 참위(소위)에 임용됐다. 구한말 혼란기에 부자가 동시에 유학하는 행운을 손에 쥐었다니, 그 열정과 출세욕망은 매우 긍정적인 인자로 가히 짐작이 간다.
아버지 김정우는 귀국해서 대한제국의 육군 군기창장(현재의 병기감)으로 근무하며 대한제국 군수공업 분야의 테크노크라트 역할을 했다. 이러한 부친의, 개화 의식과 진취성은 김경천(초기이름 김영은, 김광서)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김경천은 8살 때 아버지를 따라 함경도 북청에서 경기도 광주를 거쳐 경성(서울)으로 이사하여 순화동에 거주한다. 15세에 일본인이 세운 경성학당을 이수하며 일본어에 접하게 된다. 1896년 일본 민간단체가 세운 경성학당은 현재 회현동 남산 아래 부근이었으며, 일본어 전문교육기관이었다. 일본어를 배우게 한 것도 아버지 김정우의 포석이었다. 경성학당의 대표적인 졸업생으로는 육당 최남선, 윤백남(조선 영화계 개척자) 등을 배출되었으며 김경천은 여기서 유창한 일본말을 익히게 된다. 경성학당 재학 중에 김경천은 1904년 황실 유학생으로 선발되는 기회를 잡아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황실유학생 동기 중에는 육당 최남선, 최린 (천도교 지도자, 독립선언 33인), 조소앙(본명 조용은, 독립운동가 임시정부 외무부장 ) 등이 상위에 있을 정도로 엄선된 인물들이었다. 이 모두가 아버지 김정우가 일본 유학과정에서 경험한 근대교육과 개화된 효과에 따른 것이다. 김경천은 지일(친일) 유학파 엘리트로서 당연히 출세 코스로 들어선 것이다.
일본에서도 부친의 의도대로 고급 과학기술을 익히기 위해 도쿄의 일반 중학교(준텐중학교) 과정을 이수 중이었다. 그러나 조선정세는 위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러일전쟁의 승기를 잡은 일본은 거칠 것 없이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고, 조선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망국의 흐름이었다. 김경천은 함경도인 특유의 대담함과 호방함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행동이 날렵하고 체격이 당당하지만 앞 길에 대해 깊은 고뇌 속에 빠졌다.
명색이 황실유학생인 김경천은 동기이자 선배인 최남선 최린 조소앙 등과 만나며 울분 속에 날을 보내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에 고심했다. 김경천은 마침 나폴레옹의 전기를 서점에서 사다가 세 번이나 읽었다. 패망이 눈앞에 다가온 조국을 구하기 위해서는 ‘군인의 길‘을 가야 한다고 확신하기 시작했다. 김경천은 과학 분야 엔지니어로 키우려는 부친과 형을 부단히 설득하여 마침내 군인의 길을 택한다.
100대 1의 경쟁을 뚫어야 합격한다는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육사의 예비학교, 중유)에 1905년 편입학한다. 중유의 외국 유학생은 김경천과 중국인 귀족 1명뿐이었다. 차별과 따돌림을 이겨내며 중앙유년학교를 마치고 1907년에 일본육사 본과로 진학한다. 그러나 육사 재학 중 아버지와 형이 갑자기 사망하는 청천벽력의 액운을 맞았다. 그는 아버지와 형의 잇단 사망이 일본의 조선침략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의심을 품었다. 이 또한 후일 망명 결심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1907년 8월 조선에서는 군사권이 일본으로 넘어감에 따라 대한제국군대가 폐지되고 무관학교도 문을 닫게 되었다. 이에 따라 대한제국 무관학교(사관학교) 재학생, 지청천 홍사익 이응준 등 44명이 1909년 일본의 도쿄 육군중앙유년학교 3학년 조선인 특별반으로 편입해왔다. 육사 본과에 재학 중이던 김경천에게 44명의 후배가 갑자기 생겨난 것이다. 어린 후배들에게 특별한 성의와 관심으로 수시로 다녀갔다. “일본놈보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조국에 일신을 받치자”라며 후배들에게 의식을 불어넣었다.
김경천은 22세가 되던 해 1911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23기로 마치게 된다. 일본 육사 5년 과정과 수습장교과정 1년을 거치는 정통 코스를 수료하여 현대적 군사지식을 이수한 군사 엘리트 한국인이었다. 제국주의 일본에서 일본 육사와 해군병학교(해사) 출신의 장교 임관은 고등문관(고문) 시험합격자만큼 높은 평가와 대우를 받던 시절이었다. 일본 해군병학교는 순혈주의로 조선인에게는 입학조차 안되었다. 그러나 이해는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되는 경술국치의 해로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던 해였다. 김경천 개인은 한없이 영예로웠으나 그의 조국은 깊고 어두운 망국의 길이었다.
당시 도쿄중앙유년학교에 재학 중이던 대한제국무관학교 출신 학생들은 망국의 비통함에 향후 진로와 학업을 계속할 것인가에 관해 집단 토론을 벌였다. 도쿄 아요야마 묘지에서 김경천의 3년 후배들인 지청천(본명 지대형, 훗날 광복군 사령관), 홍사익(1889-1946, 훗날 일본군 육군 중장), 이응준(1891-1985 초대 육군참모총장), 신태영(1891-1959, 3대 육군참모총장) 등 재학생 30여 명이 모였다. 전원이 퇴학계를 내고 조선으로 돌아가자는 안과 황궁 앞에서 자결하여 기개를 보이자는 주장이 강력하게 개진되었다.
현역장교인 김경천은 며칠 뒤 뜻이 맞는 후배, 지청천 홍사익 이응준을 별도로 불렀다. 그들은 헌병과 경찰의 감시를 피해 도쿄에서 떨어진 요코하마의 중화요리점에서 모였다. 논의 결과 ‘일본군에서 배울 것을 다 배운 다음에 독립투쟁의 길을 실행하자!’로 결의하며, 피를 짜내 마시고 맹서를 한다.
김경천은 군인인 형(김성은, 일본 육사예과 대한제국 장교 임관)으로부터 일찍 기마를 배워 말을 다루는 실력이 뛰어났다. 일본 육군에서도 최우수 장교들의 보직인 최정예사단 육군 1사단 기병 1연대에 임명을 받는다. 이때의 기병은 기계화 기갑부대가 아니라 말을 타고 전투를 하는 기병대를 말한다. 이 기병대에서 연마한 실력이 후일 소만국경에서 김경천이 ‘백마를 탄 김장군’이란 별칭을 얻게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1911년 정기휴가를 받아 7년 만에 기병장교의 복장으로 당당히 귀국한다. 7년이나 그리워하며 결혼을 약정해둔 고양군 용강리(현재 마포구 용강동) 유진사의 딸인 유정화와 결혼한다. 기병장교인 그는 말을 타고 결혼했고, 말을 타고 경성시내를 다녔다.
그리고 김경천은 현재 표지석이 서있는 사직동116번지 인왕산 기슭 잣골에 넓은 주택(750평)을 매입하여 신혼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가족들이 경성에 살아 있었다면 이 재산은 수천억의 재산이 되었을 텐데…
이렇게 사직동과 그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상속한 재산이 상당하였다. 김경천은 미래를 대비해 서서히 재산을 정리해 망명 준비 자금을 마련하였다. 1910년, 유력한 집안 이회영 일가 재산을 처분하고 서간도로 망명하는 것과 유사한 과정이었다.
김경천은 일본으로 돌아가 소위, 중위로 재직 중인 1914년 유럽에서 세계1차대전이 벌어진다. 일본은 영국 불란서 러시아 미국과 함께 연합국으로 참전하여 독일 오스트리아 터키와 전쟁을 벌이는 상황이 전개된다. 일본의 기세가 더욱 등등해져 세계열강의 반열에 들어간 형상이었다.
김경천은 1916년에는 동경 1사단에 근무하며 기병 전술은 물론 타 병과인 보병 전술까지 습득해 미래 투쟁의 실력을 배양하고 있었다. 가족을 동경으로 불러 달콤한 신혼생활을 보내며, 조선인 일본 육사 출신 장교 모임인 전의회의 회장이 되어 1919년을 맞는다.
후배 지청천도 일본육사를 26기(1914년)로 졸업했다. 지청천은 중국에서 독일 조차지를 점령하는 청도전투에 소대장으로 참전해 부상을 당하며 전투와 실력을 키워나갔다. 조선인이 일본군으로 1차대전에 참전한 매우 희귀한 사례였다.
극동정세는 매우 복잡해졌다. 일본은 1918년 러시아 혁명기의 혼란 와중에 연해주와 시베리아에 대한 진출야망을 표출했다. 소련혁명파인 적군파(공산당)를 배제하고, 반혁명파인 소련 백군파와 체코사단(체코인으로 구성된 백군파 지원사단)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미, 영 ,불과 함께 연해주에 병력 5만여 명을 진격시켰다. 주력은 일본군이었다. 이른바 시베리아 내전에 개입해 시베리아 출병을 단행한 것이다.
동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 서쪽으로는 바이칼호 연안, 북쪽으로는 하바롭스크와 니콜라엡스크까지 군을 배치하여 시베리아의 광대한 지역에 일본의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연해주에 근거를 둔 한인사회와 한인 독립세력에게 향후 엄청난 임팩트를 주는 사건이었다.
김경천과 지청천은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왜 망명을 결심하게 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