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사회칼럼

[법현스님의 동행] 마음을 나타내는 말 제대도 이해하려면

[아시아엔=법현 스님, 열린선원 원장] 옛날 어떤 젊은 수행자가 있었다. 그는 아주 계율을 잘 지키고 참선수행을 열심히 하였다. 그야말로 불교의 모범생이었다. 그가 있는 사찰에 열심히 다니던 노파가 그를 유심히 보았다. 할머니는 그가 깨달음을 얻어 출가한 스님들뿐만 아니라 세상 중생들을 잘 구제할 큰스님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 그래서 양지 바르고 물도 좋고 조용한 산 속에 수행할 수 있는 암자를 지어 스님에게 바쳤다.

그리고는 “스님께서 오로지 도만 닦는다면 10년 작정하고 보살필 것이니 다른 것은 하나도 신경 쓰지 말고 수행만 하겠느냐”고 의향을 물었다. 그는 “출가수행자로서 누가 돕지 않아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이 수행인데 도와준다니 고마운 마음으로 열심히 정진하겠다”고 답했다.

젊은 스님은 그날부터 열심히 참선을 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잠 자고 ,밥 먹고, 생리 해결하는 것 빼고 나머지 시간은 모두 수행에다 쏟아부었다. 어떤 때는 잠자는 시간도 아끼고 또 어떤 때는 밤을 새면서까지 참선을 했다.

멀리서 지켜보는 할머니는 불이 꺼지지 않은 스님의 방을 지켜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물론, 빨래나 밥 짓기,청소하기 등은 할머니 몫이었다.

세월이 흘러 드디어 서로 약속한 10년째 되는 날이 다가왔다. 그날 저녁이 되기 전 할머니는 자신의 딸을 불러 말했다. “오늘 저녁에 스님께 밥상을 가지고 가서 잘 드시게 해라. 그리고 여기로 오지 말고 스님과 잠을 자고 오너라. 밤에는 스님이 하자고 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다 해드려라.”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머니가 시키는 일이니 그대로 하였다. 저녁에 밥상을 가지고 가서 스님께 드리고 그날 밤 스님 혼자 있는 암자에서 함께 잤다.

다음 날 아침. 할머니는 딸에게 물었다.

“잘 드시더냐?”

“예.”

“함께 잤느냐?”

“예.”

“좋아하시더냐?”

“아니요.”

“그래? 뭐라고 하시더냐?”

“네. 제 살을 대어보아도 아무런 느낌이 나지 않고, 저를 안아보아도 마치 나무나 돌을 대한 듯하다고 하셨습니다.”

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노파는 매우 화를 내며 암자로 올라가 말했다. “내가 당신 같은 불한당을 몰라보고 10년이나 헛수고를 했구나. 에이 분하다. 어서 빨리 꺼져라.”

하고는 마구 몽둥이질로 스님을 쫓아내고 암자를 불질러버렸다. 분명히 그 스님은 열심히 수행했고 여인을 나무나 돌처럼 대했으니 계율도 잘 지킨 것이다. 그런데 왜 그 노파는 스님을 쫓아내고 암자를 불 태웠을까?

이 스토리는 ‘파자소암’(婆子燒菴)이라는 선가의 화두(話頭)다. 이른바 ‘화두참선’(話頭參禪)의 명상주제다. <선문염송>(禪門拈頌)이라는 책에 나온다. 왜 선가에서는 이렇게 논리적이지 않아 보이는 말들을 주제로 명상을 해온 것일까? <구약성서>에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하늘에 닿을 성을 쌓는 것을 보고 신이 그들의 말(言語)을 하나에서 여럿으로 흩어놓아서 소통이 되지 않아 결국 성 쌓기를 포기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중국역사에서는 100년 이상을 견뎌낸 왕조가 드물다. 그만큼 많은 나라와 권력이 서로 다투면서 위아래나 옆으로 전해지는 말들의 본뜻이나 행간에 숨은 뜻을 이해하는 것이 꼭 필요했다. 이해하지 못하면 9족이 죽음을 면치 못하는 경우도 생길 것이니 말이다. 이런 사회 배경을 가지고 중국에서 화두참선이 성행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말을 이해하는 것은 세속에서는 삶을 유지하거나 권력을 쥐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산속의 수행자들에게는 그 이해의 대상은 권력이나 적대국의 언어가 아니라 진리의 말씀이나 우주의 언어다. 오늘의 사람들은 사랑해서 가정을 이룬 사람들의 속마음을 담은 말이나 직장 동료들의 말 또는 수없이 쏟아내는 소셜미디어의 언어들을 혼선 없이 이해해야만 저 스님처럼 쫓겨나는 일이 없지 않을까? 아니면 쫓겨나더라도 제 갈 길을 가면 그만일까?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수행을 해도 가슴이 뜨겁게 뛰어야지 젊고 아리따운 아가씨를 대하고도 나무나 돌 같은 느낌을 가졌다면 바람직한 것이 아니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을 가지고 노파의 행동을 이해하기도 한다. 이렇게 다른 언어가 아니라 같은 언어라 할지라도 그 말의 제 뜻, 본 뜻, 행간에 숨은 뜻, 진정성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 말을 이해하기보다는 이해하려는 노력이 매우 중요하며 그것을 이해해 가는 과정이 더 중요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 글을 읽는 그대는 어떤 느낌을 가지셨는가? 덧붙여 생각하고 싶은 것은 기독교의 구세주인 메시아나 불교의 미래 부처님인 미륵은 다른 사람, 다른 존재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사랑의 소유자, 실천자라는 것이다.

법현스님

열린선원 원장, 불교생명윤리협회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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