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드윈 헨리 랜드시어(Edwin Henry Landseer)의 <충견(The Faithful Hound)>(1830)은 언뜻 보면 충성심을 그린 한 폭의 그림이다. 외로운 전장에 중세의 기사가 쓰러져 있다. 그의 말도 함께 죽어 있다. 시신을 거두러 오는 전우도 없고, 마지막 기도를 올려 줄 사제도 없다. 그의 희생을 기리는 비석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한 마리의 사냥개만이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이 그림이 마음을 움직이는 이유는 그려진 것보다 오히려 그려지지 않은 것들에 있다. 전투는 끝났다. 영광은 사라졌다. 남은 것은 침묵과 충성뿐이다.
중세의 전설은 성배를 지키는 기사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최후의 만찬에서 사용된 잔이든, 하느님의 은총을 상징하는 성물이든, 성배는 기사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가장 숭고한 대상이었다.
그런데 랜드시어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그 전설이 거꾸로 읽히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기사가 쓰러졌고, 그의 곁을 지키는 것은 개였다.
그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충견에게 쓰러진 주인은 성배였다. 더 이상 성배는 어딘가 숨겨진 신비로운 잔이 아니다. 개가 사랑했고, 평생 따랐던 바로 그 주인이 성배인 것이다. 그 생각은 오늘날의 군견들을 떠올리게 했다.
군견은 폭발물을 탐지하고, 실종자를 찾고, 국경을 순찰하며, 병사와 함께 위험 속으로 들어간다. 군견은 정치도 모르고 전략도 모른다. 훈장도, 승리도 알지 못한다. 군견이 아는 것은 자신을 훈련시키고, 믿어 주고, 함께 걸었던 단 한 사람뿐이다.
실제 전장에서는 전사한 핸들러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는 군견들의 이야기가 종종 전해진다. 몇 시간이고, 때로는 다른 병사가 조용히 데려갈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킨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흔히 본능이라고 말한다. 아마 맞을 것이다. 그러나 본능만으로는 그 장면이 우리 마음을 이토록 깊이 흔드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군견에게 주인은 살아 있을 때나 죽은 뒤에도 여전히 주인이다. 죽음은 인간에게는 모든 것을 바꾸지만, 개에게는 그렇지 않은 듯하다. 둘 사이의 유대는 죽음으로도 끊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그래서 랜드시어의 충견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마지막 파수꾼처럼 보인다.
우리는 돌과 청동으로 기념비를 세운다. 이름을 새기고, 거수경례를 하며, 추모한다. 그러나 개는 그런 것을 하지 않는다. 그저 그 자리를 지킬 뿐이다. 그 침묵의 곁 지킴은 우리에게 추모란 말보다 먼저 곁을 지키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중세의 기사들은 성배를 지켰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랜드시어의 그림에서 마지막 성배의 수호자는 한 마리의 개이다. 아니, 어쩌면 더 정확한 표현은 이것일 것이다. 충견에게 쓰러진 주인은 성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