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사람들은 개를 반려동물이라 부른다.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뜻이다. 공원에서 개와 산책하는 사람들을 보면, 목줄은 통제의 도구라기보다 서로를 이어 주는 신뢰의 끈처럼 보인다.
얼마 전 영화 <War Horse>를 다시 떠올렸다. 제1차 세계대전은 농장에서 뛰놀던 말을 군대로 데려갔다. 소년 앨버트는 말 조이의 목줄을 놓아야 했다. 한국전쟁의 군마 레클리스도 그렇게 전우가 되었다. 우리는 지금도 그들의 이름을 기억한다.
그런데 개는 어떨까. 작년 진료실에 스물한 살 병사가 찾아왔다. 오른손을 군견에게 물렸다고 했다. 상처를 치료하며 물었다. “수의학과를 나왔습니까?”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원래 개를 좋아해서 지원했습니다.” 상처는 깊었다. 손을 치료하는 데 3주가 걸렸다. 치료가 끝난 뒤 그는 다시 그 군견 곁으로 돌아갔다.
그 후로도 나는 종종 그 청년을 떠올린다. 자신을 문 군견을 원망하지 않고 다시 목줄을 잡았던 사람이다. 얼마 전 현역 군의관으로부터 뜻밖의 말을 들었다. “군견은 logistics에 속합니다.” 행정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군견은 군수 체계에서 사육되고 훈련받고 관리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다시 그 청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에게 군견은 군수품이 아니라 함께 생활하는 존재였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준비하던 소련은 1930년대 전문 군견학교를 세우고 대전차 군견을 조직적으로 양성했다. 조련사들은 독일 셰퍼드를 비롯한 군견들과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먹이를 주고 훈련시키고 신호를 익혔다. 그러다 전쟁이 시작되자 일부 군견은 폭약을 등에 싣고 적 전차 밑으로 들어가는 임무를 맡았다.
그 마지막 순간, 목줄을 쥐고 있던 사람은 무슨 마음이었을까. 몇 해 동안 함께 길러 온 개가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마지막 명령을 내리는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는 군수품 하나를 출동시키고 있었을까. 아니면 가장 충직한 전우를 떠나보내고 있었을까. 나는 아직도 그 질문에 선뜻 답하지 못한다.
오늘날 우리는 개를 가족이라 부른다. 전쟁은 그런 개에게도 다른 이름을 붙였다. 군견, 탐지견, 경계견, 그리고 대전차 군견. 이름은 달라졌지만 목줄을 잡던 사람의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군대는 군견을 logistics, 곧 군수 자산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진료실에서 만났던 스물한 살 군견병도, 오래 전 이름 모를 군견 조련사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들에게 목줄은 통제의 끈이 아니라 신뢰의 끈이었다.
영화 <Megan Leavey>를 다시 보았다. 미군의 군견은 군번을 부여받아 복무하고, 부상이나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로 더 이상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면 은퇴하여 새로운 가족을 만나기도 한다. 시대는 달라졌다. 전쟁은 여전히 군견을 필요로 하지만, 이제는 그들의 마지막 삶까지 돌아보기 시작했다.
영화 속 조이는 끝내 주인의 품으로 돌아왔고, 렉스도 핸들러의 곁으로 돌아왔다. 현실의 모든 군견이 그렇게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기다린다. 다시 목줄을 잡을 수 있는 날을.
전쟁은 많은 것을 빼앗아 간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누군가를 기다린다. 말을 기다리고, 개를 기다리고, 사람을 기다린다. 어쩌면 평화란, 다시 목줄을 잡을 수 있는 날이 찾아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