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스무스 ‘우신예찬’과 김지하 ‘오적’, 시대를 넘어 권력을 비춘 풍자의 힘

어제(7월 12일)은 에라스무스(Erasmus, 1466?~1536)가 세상을 떠난 지 490년이 되는 날이다. 며칠 전 그의 <우신예찬>을 다시 읽었다. 학생 시절에는 그 기지와 유머에 감탄했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은 그 웃음 속에 숨은 깊은 성찰이 더욱 마음에 와닿았다.
문득 반세기 전 고등학생 시절이 떠올랐다. 유신 시대에 시인 김지하의 ‘오적’을 읽으며 받았던 충격은 아직도 선명하다. 시대도 다르고 언어도 달랐지만, <우신예찬>과 ‘오적’은 풍자라는 문학의 힘으로 서로 맞닿아 있었다.
<우신예찬>에서 ‘우신(愚神)’은 스스로를 찬양하는 듯 말하면서 교황과 성직자, 왕과 귀족, 학자와 철학자들의 허영과 위선을 하나씩 드러낸다. 노골적인 분노 대신 웃음을 택했고, 직접적인 공격 대신 아이러니를 선택했다. 독자는 남을 비웃다가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오적’ 역시 풍자의 힘을 보여 준 작품이었다. 현실의 권력과 특권을 정면으로 겨냥했지만, 그 목적은 증오를 선동하는 데 있지 않았다. 웃음 속에서 위선을 드러내고, 사회가 스스로를 성찰하도록 만드는 데 있었다.
좋은 풍자는 상대를 침묵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독자로 하여금 “혹시 나에게도 저런 모습이 있지 않은가”를 묻게 만든다. 그래서 풍자는 칼이 아니라 거울에 가깝다.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격랑 속에서도 어느 한편의 열광적인 대변인이 되기를 거부했다. 그는 교회의 부패를 비판했지만 인간에 대한 희망은 버리지 않았다. 그의 풍자는 사람을 향한 조롱이 아니라 인간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인문주의적 성찰이었다.
생각해 보면 풍자는 어느 시대에나 불편한 존재였다. 권력도, 사람들도 자신을 비추는 거울을 반기지 않는다. 어제 풍자를 칭찬하던 사람도 오늘은 풍자의 대상이 되는 순간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풍자는 어느 한 진영의 무기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들이대는 거울이어야 한다.
<우신예찬>이 500년 가까운 세월을 견뎌 온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 책은 특정 시대의 누구만 풍자한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반복되는 허영과 독선, 위선을 비추었기 때문이다. ‘오적’ 또한 발표 당시의 시대를 넘어 지금까지 읽히는 까닭은 특정 인물을 넘어 권력과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을 성찰하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좋은 풍자는 사람을 모욕하는 언어가 아니라 사람을 성찰하게 하는 언어라고 믿는다. 웃음은 가장 부드러운 표현이지만, 때로는 가장 오래 남는 질문이 된다.
490년이 지난 오늘, 나는 다시 에라스무스를 떠올린다. 그리고 반세기 전 처음 읽었던 ‘오적’도 함께 떠올린다. 시대는 달라졌고 권력도 여러 번 바뀌었다. 그러나 인간의 허영과 위선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어쩌면 ‘우신’도 ‘오적’도 특정 시대의 인물이 아니라 권력을 가진 인간 안에 늘 숨어 있는 그림자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우신예찬>도 ‘오적’도 과거의 고전으로 머무르지 않고, 오늘도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 살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