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크루지 이야기로 돌아보는 삶의 전환점
스크루지는 어쩌면 오늘날 치열하게 살아가는 가장의 모습 같다고도 할 수 있다. 내가 크리스마스 캐럴을 새삼 언급하는 것은 스크루지와 비슷한 경험을 통해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그러면 먼저 내 이야기를 하겠다.
나는 평생을 돈과는 거리가 먼 기초과학에 매료되어 살았다. 미국 MIT와 Woods Hole 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마친 후 1998년 한국에 돌아와 정부출연연구조직에서 6년 넘게 근무하며 먼 바다를 마음껏 탐사하였다. 그리고 2003년 12월 24일 모교(Alma Mater)인 서울대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조교수, 부교수를 거쳐 정년을 2년 앞두고 정교수에 이르렀으니 누가 보기에는 자기 꿈을 이룬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다.
기초과학자에서 서울대 교수까지의 여정…살아 움직이는 지구를 가르친다는 고민
지구과학과 가운데서도 나의 전공 분야는 지진과 화산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곳들을 연구하는 소위 ‘판구조론’이다. 나는 가끔 사람들에게 우리나라 최초의 지구물리학자가 누군지 아느냐고 농담을 던진다. 나는 어쩌면 그분은 단군인지도 모른다고 한다. 판구조론을 이해하지 않고는 이렇게도 지진과 화산을 찾기 어려운 안정적인 땅 덩어리 위에 우리나라를 세웠을까 싶어서이다. 지구는 늘 역동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한반도가 안정한 지역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2억 년 전에는 그 화산지진대가 우리나라에 걸쳐져 있었다. 그것이 아래로 내려가 현재 일본과 대만에 걸쳐진 것이다.
학생들에게 제대로 지구과학을 가르치려면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지구를 가르쳐야 하는데 학교에 부임한 이후 이것이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우리나라 암석들은 대부분이 오래된 것들인데다가 대양의 서쪽에 자리 잡고 있어 습도가 높고 또 식생(vegetation)이 많아 깨끗한 암석을 관찰하기 쉬운 곳이 아니다.
나는 우연히 이런 고민거리를 MIT에 있을 때 선배였던 조앤 스톡 교수에게 털어놓았다. 그러자 그녀는 자기가 여름마다 캘리포니아공과대학(CalTech) 학생들을 이끌고 산안드레아스 단층을 비롯하여 10여 일간 캘리포니아 일대를 돌며 야외조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거기에 서울대 학생들을 데리고 오면 어떠냐고 제의했다. 캘리포니아는 우리와 정반대로 신생대 지각이고 또 사막이라 암석 관찰에 딱이었다. 그날로부터 철저한 사전 준비를 거쳐 2006년 6월 말 서울대 학생 12명을 데리고 LA로 가서 캘리포니아공과대학 학생들 및 교수들과 합류하였다.

캘리포니아 야외조사, 그리고 새로운 길의 시작
사막에서의 서바이벌 스킬도 배우면서 우리 학생들에게 평생 한번 경험할까 말까 하는 유익한 시기 야외지질조사였다. LA와 샌프란시스코를 이어주는 캘리포니아 국도 1번은 아름다운 해안도로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나도 예전에 몇 차례 가족과 온 적이 있는데 이 일대가 지질학적으로 매우 독특하고 교과서에서나 나올 법한 지질구조들이 무수하게 있다는 것을 야외탐사를 통해 처음 알았다. 정말 나 같은 지질학자에게는 성지순례 같은 경험이었다. 탐사가 끝날 무렵 우리는 마지막으로 데스 밸리를 거쳐 7월 4일에는 미국 독립기념일에 맞춰 라스베이거스에서 폭죽을 보며 마무리하기로 했다.
이것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7월 2일 여느 날과 다르게 일곱 대의 차량이 캐러밴 형식으로 비포장도로를 따라 출발하였다. 내가 뒤에서 두 번째 차를 운전했는데 앞서 가는 차들이 내뿜는 먼지 때문에 시야가 가려졌던 것 같다. 갑자기 내가 운전하는 차량의 바퀴가 도랑에 빠지면서 차가 한 바퀴 반 굴렀다. 그리고 뒤집히면서 차의 지붕이 내려앉았는데 나는 끝까지 운전대를 놓지 않았다. 그 결과 목 아래가 완전 마비되는 장애를 입었다.
한순간에 뒤바뀐 삶, 사막에서의 사고
나는 곧바로 의식을 잃었다. 미국 학생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 나를 차에서 빼낸 다음 7월 무더위 속에서 심폐소생을 실시하여 나의 생명을 연장하는 동안 인공위성 전화기로 긴급구조를 신청했다. 45분 만에 그 사막 한가운데로 응급 헬리콥터가 날아왔다. 내 차에 동승했던 학생 한 명이 크게 다쳤다. 응급요원은 그 학생은 살릴 가망이 없지만 나는 살릴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여 나만 응급 헬기에 실어 병원으로 갔는데 내가 도착한 곳은 캘리포니아 사막 가운데 과연 이런 곳에도 사람들이 사는가 싶은 Bakersfield였다.
나는 일단 운 좋게 병원에는 왔지만 대도시의 큰 병원이 아니라는 사실에, ‘지금은 살았지만 어쩌면 곧 죽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내가 이송된 Kern Medical Center는 캘리포니아 정부가 특별히 외진 곳에서 야외활동을 하다가 다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든 전문 트라우마 센터였다. 매년 600명의 나 같은 환자가 병원 옥상에 헬리콥터로 이송된다고 한다.
죽음의 문턱에서 들려온 소리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사고 직후 곧바로 의식을 잃었다. 그런데 사람이 의식을 잃어도 귀는 열려 있다고 한다. 나는 의식이 없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의 상황을 머릿속에 그렸다. 의식이 없는 상황 속에서도 응급 헬기를 탔던 것을 정확히 기억한다. 그리고 우연히도 사고 전날 밤 사방이 암흑인데 저 멀리 환해 보이는 지역이 있었다. 미국 교수에게 저기 불빛이 라스베이거스 쪽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아마 Bakersfield일 거라고 했다. 다음 날 내가 그곳에 안착하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나는 헬리콥터로 내가 가는 도시가 미국의 바이오메디컬의 메카인 샌디에이고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병원 도착 직후 나의 활력 징후(vital sign)들이 너무나 약해 곧바로 수술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3일 뒤 신호들이 다소 안정되자 ‘머리와 몸을 다시 연결하는’ 수술을 실시하였다. 귀가 열려 있었기 때문에 의사와 간호사의 소리를 들으면서 나의 상태를 나름 짐작해 보았다. 그리고 어떻게 이런 어려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머리를 굴려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헤쳐 나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이렇게 죽는구나’ 하며 이번에는 내가 빠져나올 수 없는 구덩이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다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을 다잡고 죽음을 맞이할 채비를 하였다. 일종의 고해성사 같은 경험이었다.

세 번의 죽음과 세 번의 부활
무의식 상태에서 세 번의 꿈을 꿨다. 그때 꾼 꿈들이 너무나 생생해서 의식이 돌아온 뒤에도 꿈에서 본 것과 현실세계를 분간 못할 지경이었다. 꿈의 내용은 좀 황당한데 꿈마다 내가 죽는 것으로 끝났다. 그런데 신기하게 다시 죽음에서 부활하였다. 그러니까 두 번 죽고 세 번 살아나는 경험을 한 것이다. 그런데 죽음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정해진 절차에 따라 자연스럽게 단계 단계로 진행되는 것 같이 느껴졌다.
임사체험을 통해 내가 느낀 것은 죽음이 두렵지 않고 오히려 할 만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교회를 안 다닌다. 그리고 평소에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느낀 죽음은 나의 인생관을 완전히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궁금증은 어쩌면 죽음에 관한 것일 것이다. 현대 과학은 모든 사람에게 같은 결과와 경험을 제공한다. 한편으로는 막강해 보이지만 정작 우리 인간이 알고 싶어 하는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 대한 답을 얻고자 때로는 신부와 목사를 찾아간다. 내가 말하는 근원적인 문제라는 것은 예를 들어 ‘사람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가’, ‘세상에는 선과 악이 있는가’ 같은 문제들이다.
죽음이 몇 단계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때 병원에서 죽음의 초입까지는 들어가 봤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초입이 제일 무서울 거라고 다들 생각하지 않는가? 그런데 그것이 나쁘지 않았다. 좋았다고까지 이야기하면 나와 생각이 다르고 열심히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모욕하는 것 같아 거기까지는 가지 않겠다.
어머니 앞에서 막혀버린 말, 그리고 살아내야 할 삶
사고 소식을 접하자마자 어머니께서 한국에서 LA로 날아오셨다. 그리고 한인 택시를 타고 서너 시간 거리에 있는 Bakersfield 병원까지 달려오셨다. 목 접합 수술이 끝난 다음이었다. 의료진은 언제 내가 깨어날지 몰랐지만 다행히 수술 후 곧바로 깨어난 덕분에 어머니께서 특별히 나를 면회를 하실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나는 스스로 호흡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목에는 호흡을 도와주는 관이 꽂혀 있었고 그래서 말을 해도 소리가 다 새어나갔다. 나는 어머니가 곁에 있다는 것을 알고, 내가 본 죽음의 세계를 이야기했다. 그런데 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 마음이 달았다. 역시 하늘이 죽은 자를 하늘로 이송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고에 대비하여 백업 장치를 해놨구나라고 확신했다.
어머니에게 내가 본 죽음의 세계를 천기누설하려고 했는데 하늘이 이런 상황에 대비하여 나의 목소리를 차단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수록 더 목놓아 어머니에게 이야기하려고 했다. 엄마와 아빠도 이제 곧 죽을 텐데 내가 죽어 보니까 죽을 만해. 죽음을 그냥 두려워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이것이 어디 아들이 부모에게 할 말인가?
어머니께서 다녀가신 후 아버지께서 전화로 지금 상황이 어떠냐고 물으셨다고 한다. 그러자 어머니께서는 어쩌면 생명은 살릴 것 같은데 내가 어쩌면 머리를 심하게 다쳐 지금 지능이 떨어진 것 같다고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웃긴 이야기다. 이때 상황에 대한 이야기는 2008년 쓴 <0.1그램의 희망>이라는 책에도 나와 있다.
그 이후 한국에 돌아와서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마다 내가 본 죽음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히려 병문안 온 사람들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죽음에 대한 경험이 나를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다. 나는 성격이 유하고 비교적 부드러운 사람이었는데 임사체험 후 단 한 번도 내 처지를 비관하거나 울어본 적이 없다. 나도 너무 신기하다. 어쩌면 세상에 알 것을 다 알아버리니 나머지 문제들은 사소해져 버린 걸지도 모른다.
한번은 기자가 내 고등학교 친구에게 내가 학창시절에도 이렇게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이었냐고 물었다. 그 친구는 아니라고 그랬다. 그러면 대학교 때 그랬냐고 물었다. 대학교 때도 아니었다고 그는 답했다. 그러면 현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냐고 기자가 캐물었다. 그러자 내 친구 왈, 자기 생각에는 사고 때 머릿속에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부분을 다쳐서 이렇게 된 게 아니겠냐는 농담으로 답했다고 한다.
몽테뉴와 450년을 건너 이어진 경험
임사체험에 관한 이야기를 인터넷 등에서 찾아보면 사람마다 다 다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사이비 교주가 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미국의 작가 새라 베이크웰(Sarah Bakewell)이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뉴(1533~1592)의 일대에 대하여 쓴 책(How to Live: Or A Life of Montaigne in One Question and Twenty Attempts at an Answer)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다. 내가 경험한 죽음과 너무나 일치했기 때문이다.
몽테뉴는 지금으로부터 450년 전 프랑스 보르도에 살았던 부농의 아들이었다. 그는 어릴 때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이 일찍 죽는 것을 여러 차례 경험해서 그런지 평소에도 죽음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책에서 답을 찾아보려고도 했지만 책마다 얘기가 다 달랐다. 몽테뉴는 보르도 시 의정에도 관여하면서 아주 사회적이고 활발한 삶을 살았다. 언젠가는 자기도 시장이 되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37살에 큰 변화가 왔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농장을 말을 타고 순찰하던 중 낙마를 했는데 뒤에 달려오는 말들이 그를 밟아버린 것이다. 그는 피투성이가 되어 의식을 잃은 지 반나절 만에 깨어났다. 그는 하인과 친구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가 경험한 죽음의 세계를 이야기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그게 무슨 소리냐, 너는 괴로워서 소리를 지르고 피를 토하고 스스로 옷을 찢고 정말 가관이었다고 했다. 몽테뉴는 자기가 느꼈던 것과 너무 다른 이야기를 들은 다음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죽음이란 옆에서 볼 때 끔찍해 보이지만 정작 당사자가 느끼는 내적 평온함이 있구나.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고 경외시하지만 죽음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이제 더 이상 죽음에 대해서 고민하지 말고 그냥 사는 것만 걱정하면 되는구나 깨달았다고 한다.
몽테뉴 이전에는 사람들이 글을 쓴다면 구체적인 목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몽테뉴가 만든 새로운 문학 장르인 수필은 자기 주변 신변잡기를 쓴 것에 불과하다. 앞의 내용과 뒤의 내용이 모순될 수도 있는 가벼운 글인 수필은 그 시대의 페이스북 같은 장르가 되었다. 몽테뉴는 임사체험 후 자기 성 안에 틀어박혀 자기 주변의 신변잡기에 대해서 쓰는 것에만 몰두하였다. 물론 모든 정치활동도 내려놓았다. 그는 글에서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로 여러분은 다를 수 있다고 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몽테뉴의 이야기를 보면서 ‘이것은 내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공감대를 느끼고 있다. 나는 450년 가까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몽테뉴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큰 자부심으로 여긴다. 2014년 프랑스 IPGP 연구소에 방문교수로 갔을 때 몽테뉴의 숨결을 느끼고 싶어서 보르도를 찾아간 적이 있다.

죽음을 기억할 때 비로소 보이는 삶
다시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로 돌아가자. 무엇이 스크루지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일까. 그것은 이브 날 찾아온 유령을 통해 스크루지가 자신이 죽은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인 죽음을 애써 망각하고 산다. 만약 우리가 죽음을 떠올리면 정상적인 인간 활동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1978년 그해 퓰리처 상을 받고 그해 죽은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어네스트 베커(Ernest Becker)가 쓴 ‘죽음의 부정'(Denial of Death)을 보면 우리 인간은 동물 가운데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가장 불행한 동물이라고 한다. 그는 인간의 역사는 엄연한 죽음에 대한 부정으로 관철되어 있었으며 우리는 죽음을 잊고자 온갖 대안을 제시해 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그렇다고 없어질 문제인가. 베커는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사회가 금기시하지만, 오히려 죽음에 대한 생각이 우리 삶을 더 이롭게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스크루지, 몽테뉴 그리고 나인 셈이다.
이번 크리스마스를 맞아 스크루지의 변신을 생각해 보며 우리가 더욱 더 인간 본연의 자세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되길 희망해 본다. 모두에게 즐거운 성탄절이 되기를 기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