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사회문화

[이택순의 아무르 답사⑩] 제국의 항구, 블라디보스토크

석양빛의 블라딕 항구, 자유와 독립을 향한 에뜨랑제의 도시

1860년 7월 2일, 작열하는 여름의 태양이 우수리 만(블라디보스토크의 외해)에 떠올랐다. 우수리 만을 돌아 뿔처럼 생긴 반도를 우회하여 묵직하게 들어오는 한 척의 배가 있었다. 잠시 후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해변에, 30여 명의 건장한 청년 군인들이 배에서 내려 상륙한다. 이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후일 밝혀진다. 이들은 제정 러시아 오호츠크 전대(태평양함대의 전신)’ 소속 해군장병이었다. 인솔한 함장은 해군중위 알렉세이 키틸로비치 세프네르’였고, 함정은 러시아 해군 수송함 ‘만주르’호 였다. 그리고 이들이 상륙한 해변은 뒤에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 중국어 하이샨웨이 )라고 부르는 해안가였다.​

이들은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나타났을까?

이르쿠츠크(바이칼 호 주변)에 주둔하는 동시베리아 총독, ‘니콜라이 무라비요프 아무르스키'(1809-1881) 장군의 작전명령을 받은 것이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새로운 해군 군사기지(부동항)를 건설하고 연해주 지역을 확보하라는 명령이었다.

하바롭스크에 헌정된 무라비요프 백작 동상, 1891년

무라비요프 총독은 1809년 러시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귀족의 자제로 출생하였다. 러시아의 귀족이 가는 길, 전문 군사교육을 수료하고 장교가 되었다. 이후 러시아의 대외 전쟁, 대 터키 전 ,카프카스전에 참전하여 니콜라이 1세 황제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

연부역강한 나이 38세가 되던 해, 1847년 동시베리아총독으로 부임한다. 러시아의 총독은 행정권, 외교권에 군사권까지 행사하는 특별한 지위를 가진 지역의 최고 지도자였다.​

니콜라이 1세 황제(차르)로부터 ‘낙후된 변방 아무르 강(흑룡강, 중국어 헤이룽장) 유역을 개척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개척이 무슨 말인지 그는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러시아는 개척에 의해 시베리아를 확보했다. 그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6세기 초부터 러시아는 우랄산맥을 넘어 시베리아로 진출했다. 불과 100년 만인 1639년 북태평양 오호츠크 해까지 진출하고, 베링 해를 넘어 알래스카까지 진출했다. 이 모두 용병으로 유명한 코사크족 기병대가 앞장서고, 모피 상인들이 지원하는 상업적 동기에서 출발한 것이다. 대군의 지원없이 용병과 상인의 힘으로 획득한 영토였다.

우수리강(왼쪽)과 아무르강(오른쪽)이 합류한 대하,하바롭스크 유역

러시아는 17세기 초부터 발길을 돌려 남쪽 아무르강 유역으로 진출하려 했다. 그러나 그 저항은 시베리아와는 달리 만만치 않았다.

원래 아무르강(흑룡강) 유역은 만주족, 몽골족, 말갈족이 거주하는 청나라의 영향권이였다.

러시아는 17세기 중반부터 이곳에서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과 치열하게 격돌하며 여러차레 공방을 벌인다. 1654년에는 조선의 군대도 청나라의 요구로 징발되었다. 조총과 포병으로 무장한 조선군도 두 차레나 아무르강 남쪽에서 러시아군대와 격돌하는 대사건(나선 정벌)이 벌어졌다.

​청나라의 완강한 방어에 러시아도 병력과 무기 부족을 자각하고 양국이 협상하며 조약을 맺게 된다. 1689년 러시아 국경 네르친스크에서 체결된 네르친스크 조약이었다.

서쪽은 아무르강의 지류인 아르군강으로, 동쪽은 고르비차강과 스타노보이산맥(대흥안령산맥)을 연결하는 태평양까지, 국경을 획정하게 되었다. 청나라는 러시아로부터 아무르강(흑룡강) 양쪽 유역의 광활한 땅(한반도의 5배 크기)을 자국의 영토로 인정받은 것이다.

​청나라는 부국강병의 군주 강희제(1661-1722 재위)의 치하에 있었으며, 러시아는 개혁군주 표트르대제(1672-1725년 재위)의 치세기였다. 영민한 두 지도자 밑에서 양국은 군사력 균형 속에 이 국경은 150년간 지속된다.

​19세기 들어 국제정세는 격변하기 시작했다. 서구 유럽은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힘으로 시장과 식민지를 회득하려는 제국주의(팽창주의)를 채택하고 강한 군사력을 확보하게 됐다. 그들은 새로운 식민지를 찾아 동양으로 진출하기 시작한다. 러시아도 산업혁명에 성공하며 농노제를 폐지하고 근대적개혁으로 유럽의 열강으로 도약하였다.

​반면 19세기 들어 청나라는 만주족 중심의 무능한 지도층과 부정부패, 실정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인도 대륙을 식민지로 획득한 영국은 중국을 시장으로 노리고 있었다.

1840년 아편 수입금지에서 시발된 전쟁은 영국군에 의해 중국 남부 광동성이 점령당한다. 난징조약(1842년)으로 종결되나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고 엄청난 전쟁배상금을 부담하게 된다. 청나라의 국력이 허약함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소련 태평양함대의 본거지, 영웅적 군인상 조각-블라디보스토크

아편전쟁의 결과는 호시탐탐 중국 영토를 탐내던 시베리아총독 무라비요프에게 호기였다. 무라비요프는 1850년부터 3년간에 걸쳐 아무르강(흑룡강) 북쪽 유역에 군대를 파견한다.

개척이라는 명분으로 아무르강 하구까지 무단 점령하고 니콜라옙스크 군사기지를 건설한다. 이로써 태평양으로 나아갈 수 있는 출구가 확보되었다. 무라비요프는 아무르강 유역을 쉴 세없이 정찰했다. 점령지역을 방어하고 개발하기 위해 지역 농민을 해방시키고 코사크 군단을 증강하는 조치를 취했다.

​한편, 기근과 폭정에 시달리던 중국 농민층은 홍수전이라는 한족 인물에게 이끌려 민중혁명을 일으켰다. 1851년 태평천국의 난이 발생하며 1864년까지 청나라는 내우외환의 궁지에 몰렸다.

중국시장의 확대를 노리던 영국은 1857년 애로우호 선원 체포사건을 빌미 삼아 제2차 아편전쟁을 도발한다. 영불 연합군이 북경에 접근하고 황제는 수도를 포기하고 도주했다. 러시아와 미국의 중재로 영불 연합군의 철수를 유도하고 북경으로 돌아왔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었다. 미국과 러시아가 중재와 안전보장의 대가로 청구서를 내밀었다. 미국은 추가로 시장 개방을 요구했다. 그러나 인접국 러시아의 요구는 차원이 달랐다. ‘ 아무르강 북쪽 유역을 러시아에게 양도하고, 청나라가 출입 금지구역으로 묶어둔 연해주 지역을 공동관리 개발하자’는 요구였다.

내우외환에 무너진 청나라는 동북방 영토를 방어할 능력도 의지도 인물도 없었다. 반면 러시아에는 무라비요프같은 전략가가 있었다. 그 결과 1858년 톈진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미 아무르강 북방 유역은 총독 무라비요프가 극동군을 파견하며 1850년대부터 실질적으로 점령하고 개척한 지역이었다. 1858년 이런 내용을 골자로 러시아와 청나라는 아무르강 유역의 아이훈에서 조약을 별도로 체결하며 영토점령을 합법화했다. 우크라이나전쟁에서 보듯 예나 지금이나 러시아의 영토욕구는 변함이 없다.

무라비요프총독, 러시아의 극동영토 확장 선구자

무라비요프 총통은 다시 눈을 돌려 동쪽을 바라본다. 공동관리구역으로 지정된 연해주지역이었다. 선점의 효과를 단단히 맛본 그는 연해주지역도 선점하기로 결심한다.

예하 부대인 오호츠크 해군전단(니콜라옙스크-나아무르 소재)에게 연해주지역 작전지시를 하달한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부동항의 최적지를 찾아내서 기지를 건설하고 선점하라는 것이다.​

명령을 받은 세프네르 중위는 1860년 7월 2일 최적의 해안가를 발견하고 상륙했다. 이들은 이곳에서 잔잔하며 수심이 깊은 천혜의 항구 부지를 발견하고 이곳을 ‘골든 혼(Golden Horn)’ ‘황금의 뿔(금각)’이라 기록한다.

이곳이 현재 블라디보스토크(동방을 지배하라! 러시아어) 시청 앞, 러시아 태평양 함대사령부가 위치한 곳이다.

하바롭스크시 아무르 강 유역, 마치 대해를 보는 듯 광활하다

무라비요프가 구상데로 5개월 뒤, 1860년 12월 또 다른 불평등조약인 북경조약이 체결된다. 그리고 연해주가 러시아의 영토로 합법적으로 편입된다.

무라비요프총독의 전략으로 약 100만 평방km, 한반도의 5배나 되는 땅 아무르강 북쪽 유역과 연해주지역이 러시아의 영토로 확장되었다. 중국에게는 근대사의 뼈아픈 실책이었다.

러시아의 극동영토는 무라비요프로 인해 존재한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러시아는 제국의 총통 무라비요프를 기리며 그의 이름에 아무르스키(아무르의 남자) 호칭 부여하고 백작의 작위를 수여한다. 극동의 실질적 수도라 할 수 있는 하바롭스크 아므르 강가에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 공원을 조성하고 그의 동상을 세웠다. 블러디보스토크가 소재한 반도를 무라비요프 반도라 명명한다. 러시아 화폐 5천 루블 지폐에 그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블라디보스토크(약자 블라딕)는 개척한 함장 세프너를 기리며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거리를 세프네르 거리로 명명했다. 서글픈 제국주의의 상흔을 간직한 아름다운 항구, 블라디보스토크에 노을이 찾아든다.

이 도시를 향해 조선의 이주민과 망명가들이 자유와 독립을 찾아 몰려든다. 그들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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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순

전 경찰청장, '이택순의 실크로드 도전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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