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어리그에 ‘남아시아 출신’ 없는 이유
“나는 학교에서 최고의 크리켓 투수였지. 우리 학교 팀은 국제대회에서 우승하기도 했어. 그렇지만 영국에 오니까,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어. 어느 팀도 나를 받아주지 않았어. 백인들은 나의 터번을 보고 놀렸고, 팀에 끼워주지도 않았지.”
2002년 개봉해 세계적으로 흥행한 영국 영화 <슈팅 라이크 베컴(Bend it like Beckham)>에 나오는 대사다. 축구선수가 되고 싶어 하는 인도계 딸을, 아버지는 자신의 과거를 들어 설득한다. 영국 사회에서 인도계 젊은이는 백인 주류가 장악한 스포츠계에서 살아남기 어렵다는 얘기다. 영화는 여자 주인공 제스가 끝내 부모를 설득해 미국으로 축구 유학을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이는 그저 영화 속 얘기일 뿐, 실제로 영국 프리미어리그 축구에선 눈을 씻고 찾아도 인도계 선수를 볼 수 없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이 지난해 8월 흥미로운 기사를 하나 내놓았다. 베네수엘라 출신 수비수 페르난도 아몰레비에타가 프리미어리그 축구팀 풀럼에 입단하면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뛴 경험이 있는 선수들의 국적이 처음으로 100개국을 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세계 지도에 100개국 이름과 국가별 출신 선수 숫자를 소개했다.
나라별로 보면 잉글랜드에서 가까운 아일랜드가 가장 많은 148명의 프리미어리거를 배출했다. 동북아 3개국 출신 선수들도 상대적으로 활발히 영국 땅을 밟았는데, 한국(11명), 일본(6명), 중국(5명) 등의 순이었다. 그밖에 다른 아시아 지역으로 가면 프리미어리거 수는 매우 적다. 아시아 국가를 모두 합해서 이란(3명), 오만(1명), 파키스탄(1명)이 전부다. 여기서 가장 눈길을 끈 대목은 인도와 방글라데시 출신 축구선수가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다.
남아시아 국가들 규모를 생각해면 인도 축구선수 부재는 매우 진기한 현상이다. 인도(12억2000만 명), 파키스탄(1억9000만 명), 방글라데시(1억6000만 명) 모두 러시아(1억4000만 명) 보다 큰 인구대국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랜 동안 영국 식민지 지배를 받지 않았던가. 문화적·인적 교류가 잦은 것은 쉽게 짐작 가능한 일이다.
이 ‘미스터리’는 영국인들 눈에도 신기하게 보였나 보다.의 스포츠 기자 존 애쉬다운은 매우 조심스러운 어조로 다음과 같이 썼다. “(남아시아 출신 축구 선수들을 보기 힘든 것은) 받아들이기 아픈 사실이다. 더욱이 짐바브웨나 온두라스 등 매우 작은 나라들도 프리미어리그에 선수를 배출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뿐만 아니다. 영국 국적을 가진 내국인 가운데서도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계 축구선수는 매우 드물다. 영국 통계청의 자료를 보면, 인도계(140만 명), 파키스탄계(100만 명), 방글라데시계(40만 명) 인구를 합해 영국 전체 인구의 5% 수준이다. 마이클 초프라(30)가 남아시아계 영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프리미어리그 잔디밭을 밟은 게 2001년이었다. 그나마 그도 지금은 2부리그인 블랙풀에서 뛰고 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백인이다. 부모 모두 남아시아계인 축구선수 가운데 제샨 레만(30)이 있는데, 그 역시 주로 하부리그에서 활동했고, 지금은 말레이시아리그에서 뛰고 있다. 그밖에 프리미어리그를 거친 인도계 선수는 희귀하다.
인도계 ‘보이지 않는 차별’ 작용
이유가 무엇일까. 인도 출신 영국 프리미어리거가 없는 까닭은 무엇보다 인도 국내에서 축구 인기가 시들하기 때문이다. 미국 뉴욕시립대학 연구자 사타드루 센의 설명에 따르면 서부 벵골, 고아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인도에서 축구는 인기 스포츠가 아니다. 질문을 바꿔보자. 그러면 왜 인도에서 축구가 인기가 없을까. 원래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1950~60년대 인도는 아시아의 축구 강호였다. 1956년 멜버른올림픽에서는 4강까지 올라 유고에 석패했고, 1962년에는 자카르타아시안게임 축구 종목의 금메달을 따기도 했다. 인도의 축구 인기는 1970년대를 지나면서 시들해지기 시작했는데, 그 원인에 대해 설이 구구하다. 몇 가지 꼽자면 1990년대 처음 등장한 국내 프로축구리그나 인도축구협회의 방만한 운영 등이 있는데, 똑 떨어지는 대답은 아닌 듯하다.
영국에 사는 남아시아계 가운데 프리미어리거가 적게 나오는 이유에 대해서도 속 시원한 답은 없다. 중론은 영국 내 소수자인 남아시아계에 대한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다는 주장이다. 대니얼 버지 브라이튼대 교수는 남아시아계 축구선수들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 결과를 담아 <민족과 인종 연구(Ethnic and Racial Studies)>라는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했다. 그의 결론은 이렇다. “남아시아인들은 프로축구계에 진입하기 위한 문화적 자본을 가질 확률이 낮다.” 좀 고상한 표현을 간단히 풀면 남아시아계가 축구장에서 보이지 않는 인종차별을 당한다는 얘기다.
1990년대 프랑스 국가대표 축구팀은 ‘아트 사커’ 경지에 올랐다는 찬사를 받으면서 세계 축구를 평정했다. 그 중심에는 알제리 이민자의 아들인 지네딘 지단이 있었다. 2000년대 세계 축구를 호령한 스페인의 잠재력 뒤에는 카탈루니아 지역 출신 선수들과의 오랜 앙금을 풀어낸 화합의 힘이 있었다. 요즈음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독일 축구 한 가운데는 터키 출신 이민자의 아들 메수트 외질이 있다. 이민자들에 대한 화합과 축구 성적의 상관관계는 우연이라면 무척이나 흥미로운 우연이다.
오는 6월 브라질 월드컵이 열린다. 잉글랜드는 D조에 속한 이태리, 우루과이, 코스타리카와 16강 진출을 겨룬다. 승부 결과에 가장 냉정한 도박 사이트들은 잉글랜드의 16강 진출 가능성을 상대적으로 낮게 본다. 이태리, 우루과이의 진출이 유력하다는 해석이다. ‘축구종가’로서는 망신스러운 예상이다. 잉글랜드가 만약 1966년 이후 처음으로 월드컵 우승을 원한다면 국내의 보이지 않는 차별을 걷고 소수자들 사이에 숨은 재능을 찾아내는 것이 선결과제인지 모른다.
한국에서는 지난해 새 축구협회장이 당선됐다. 선거 과정에서 ‘월드컵 8강’ 공약이 나오기도 했다. 실제로 공약이 실현되리라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을 듯하다. 하지만 10년, 20년 뒤 그 꿈이 이뤄지지 말라는 법 없다. 그러려면 베트남이나 우크라이나, 캄보디아 출신 2세들이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맹활약한다는 조건이 필요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