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민족 ‘고려인’ 통한의 역사 150년

 

흔히 ‘카레스키’(실은 ‘카레이츠’가 옳음)라 부르는 유라시아 고려인은 한민족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역외 개척과 대륙 진출의 선구자이며 재외동포의 원조다. 고구려·발해 멸망 이후 한반도에 갇혀 살던 한민족의 지평을 광활한 유라시아대륙으로 넓힌 주역이 바로 고려인이다. 서세동점(西勢東漸) 제국주의 시대인 1863년 시작된 고려인의 연해주 이주는 한국 근현대사 최초의 국외 이주였다. 1902년 12월 사탕수수 농장 계약노동자로 태평양을 건넌 하와이 이민보다 39년이나 앞섰다. 그때 자발적으로 연해주로 건너가 정착한 고려인 농민 13가구 60여 명은 오늘날 700만 해외동포로 불어나 지구촌 곳곳을 누비고 있다.

고려인이 걸어온 지난 150년을 되돌아보면 한마디로 아플 통(痛)자 ‘통사(痛史)’다. 차르의 차별과 압제 속에 신음했고, 스탈린의 ‘피의 숙청’ 아래 공포에 떨다, 끝내 일제 첩자로 몰려 1937년 강제이주로 중앙아시아 허허벌판에 내던져졌다.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정착하는가 싶더니 소련 붕괴로 다시 유라시아 대륙을 떠도는 신세가 된 그들의 한 맺힌 수난을 생각하면 가슴이 메어진다. 김 텔미르 연해주고려인재생기금 회장의 한탄을 들어보자. 강제이주 전 고려인사회 지도자로 활약하다 희생된 김 아파나시의 작은 아들로 태어난 그는 소련 시절에 온갖 박해를 견뎌내고 살아남은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이다.

“나의 부친은 (원동의) 하바로프스크 시에 묻혀 있다. 어머니는 (러시아) 크림 주 옙파트라 시에, 외할아버지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주 미르자 촌에, 친할아버지는 연해주 수하놉카 촌에, 외할머니는 타슈켄트 주 사마르스코예 촌에, 그리고 친할머니는 카자흐스탄의 침켄트 시에, 형님은 연해주 크라스키노 촌에 묻혀 있다. 그러니 어떻게 이 고인들을 모셔 성묘를 할 것인가. 기가 막힐 일이다. 악마의 나라에서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

고려인들의 삶은 유랑과 이주의 연속이었다. 특히 강제이주 후 고려인들은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꿩처럼 날아다녔다”고 회상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나그네로 여긴다. 거주국인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은 물론 ‘역사적인 조국’ 한국에 대해서도 일체감이나 소속감을 갖지 못하고 있다. 강제이주로 뿌리가 뽑힌 뒤 계속된 떠돌이 생활과 정서적 방황을 트라우마로 안고 살아온 전력 때문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고려인들은 모두 4차례 대(大)이주를 경험했다. 첫 번째는 한반도에서 두만강 건너 러시아 연해주로의 자발적 이주다. 그땐 이주라기보다 19세기 조선의 기근과 봉건적 탐학에서 벗어나기 위한 탈주였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두 번째 이주는 1937년 독재자 스탈린에 의해 자행된 총체적 강제이주다. 원동 거주 고려인 18만 명을 조국 한반도와 유리된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추방해 20세기 디아스포라로 내몬 통한의 이주다. 소련은 강제이주의 목적을 ‘원동에서 일본 첩자들의 침투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라고 내세웠다. 그들은 차르 시대 이래 고려인을 원동 안보에 해로운 존재로 인식하고 국경지역에서 먼 내륙에 가두려고 했다. 강제이주는 이런 러시아 쇼비니즘의 폭거였다. 비록 소수의 간첩이 있었다 한들 고려인 18만 명을 일거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것은 1860년대 이래 고려인들이 온갖 역경을 딛고 쌓아 올린 민족공동체에 대한 전면적 부정이자 파괴행위였다.

세 번째는 1953년 스탈린 사후 중앙아시아 고려인에게 자유여행이 허용되면서 시작된 개별적인 분산 이주다. 이때 젊은 고려인들이 교육·직업 등의 이유로 슬라브 문화권인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지로 뻗어나갔다.

네 번째는 1991년 소련 붕괴 후 약 10만 명의 중앙아시아 고려인이 유랑의 길로 접어든 때다. 신생 독립국들의 민족주의 선풍과 소수민족 차별에 밀린 타의의 이주다. 소련은 15개 민족공화국으로 해체되고 권력이 토착민족에게 넘어가면서 토착어를 구사 못하는 고려인 등 소수민족은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소련 붕괴 후 밀어 닥친 극도의 혼란과 경제난도 이들의 엑소더스를 재촉했다. 신생국 간 국경이 생기면서 어제까지 소련이란 한 울타리에 살던 고려인들은 서로 다른 국적을 가진 외국인 사이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거주국으로 귀환하지 못해 이산가족이 되거나 불법체류자·무국적자로 전락해 유랑하게 되었다.

4차례 이주 속 강인한 생명력

소련 붕괴 후 고려인의 국외이주, 이동방향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하나는 그들의 정신적 바탕이 된 러시아 말과 문화가 있는 러시아로의 재이주고, 다른 하나는 88서울올림픽 이후 새롭게 떠오른 한국 진출·귀환이다. 러시아행을 선택한 고려인은 2000년대 초까지 7만~8만 명에 달한다. 그 결과 남부 러시아와 북캅카스 지역, 우크라이나가 고려인들의 새로운 생활권역으로 부상했다. 반세기 이상 단절됐던 고려인의 한국행은 특기할 일이다. 시장경제로의 전환기를 맞아 자본주와 멘토가 필요했던 고려인들에게 ‘잘사는 자본주의 나라’ 한국은 희망의 등대가 됐다.

2013년 8월 말 현재 한국에 취업목적 등으로 장기체류 중인 고려인 수는 2만 명 정도다. 그 중 우즈베키스탄 고려인이 전체의 70%인 1만4000여 명으로 가장 많고, 다음이 러시아 고려인 4300명, 카자흐스탄 고려인 1500명이다. 그밖에 키르기스스탄, 우크라이나, 타지키스탄 고려인도 740여 명에 달한다. 취업자 1인당 가족 수를 4명으로 가정할 때 유라시아 고려인 48만 중 약 17%인 8만 명의 생계가 한국취업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고려인들은 도전정신이 강하고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들은 언제나 시련을 기회로 만드는 창의적이고 강인한 모습을 보였다. 연해주를 개척해 옥토로 가꾼 주인공이 그들이었고, ‘유배지’ 중앙아시아에서 농업신화를 창조하며 뛰어난 인재를 배출한 것도 그들이었다. 소련 붕괴 후 어느 민족보다 빠르게 시장경제에 적응하여, 힘차게 재기하고 있는 것 역시 고려인이다.

오늘날 고려인은 동쪽으로 러시아 캄차카 반도에서 서쪽으로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를 가로질러 동유럽의 우크라이나에 이르는 광활한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 살고 있다. 냉전 시기 고려인들은 한국과 단절돼 있다가 냉전 종식 후 21세기를 함께 열어갈 ‘대륙 진출의 동반자’로 다가왔다. 지금 재기를 위해 안간힘 다하고 있는 고려인들은 조국의 관심에 목말라한다. 경제강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이 그들의 손을 잡아준다면 고려인들은 또 다시 성공신화를 엮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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