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겨여왕’ 김연아…행복한 런던의 기억
한국 뿐 아니라 세계 피겨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피겨여왕’ 김연아(23)가 마지막 세계선수권대회를 마쳤다.
김연아는 17일(한국시간) 캐나다 온타리오주 런던의 버드와이저 가든에서 끝난 국제빙상경기연맹(ISU) 2013 세계피겨선수권대회 여자 싱글에서 총 218.31점을 얻어 우승했다.
2014년 소치동계올림픽까지 선수 생활을 하겠다고 발표한 그에게 이번 세계선수권대회는 시작이자 끝이었다. 김연아 ‘인생 제2막’의 진정한 시작점이자, 2007년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했던 그의 마지막 세계선수권대회였다.
인생의 중요한 시점이 될 이번 대회에 김연아는 행복한 기억을 심었다. 그가 이번 대회에서 낸 프리스케이팅과 총점은 역대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이제 김연아는 2014년 소치동계올림픽을 향해 나아간다. 본인은 정작 덤덤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의 소치동계올림픽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 다시 금메달을 딴다면 김연아는 역대 세 번째로 올림픽 2연패에 성공한 선수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마지막과 또 다른 시작이 맞닿는 시점에 서 있는 김연아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우승의 감격이 채 가시지 않은 18일 그는 런던 버드와이저 가든스에서 국내 취재진과 인터뷰 시간을 가졌다.
김연아의 완벽했던 마지막 세계선수권
쇼트프로그램은 다소 아쉬웠다. 연기가 아쉬웠던 것이 아니다. 그냥 보기에 연기는 완벽했지만 점수가 그랬다. 실수없이 김연아가 연기를 펼치고 난 뒤 점수는 69.97점. 예상을 밑돌았다.
레벨4를 목표로했다가 레벨3를 받은 플라잉 카멜 스핀은 그렇다 하더라도 트리플 플립에서 롱에지 판정을 받아 감점을 당한 것은 논란이 됐다.
김연아는 “솔직히 짜증이 났다”고 털어놨다. 느린 화면으로 돌려봐도 굳이 롱에지 판정을 줄 점프는 아니었다. 쇼트프로그램 직후에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본인 스스로도 짜증이 났을 터다.
하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프리스케이팅에서 마치 심판들에게 ‘이것 봐라’하는 듯한, 논란의 여지를 불러일으킬 수도 없는 완벽한 연기를 선보였다.
김연아는 “이전에도 이런 경험이 있다. 아무래도 기록 스포츠가 아니기에 심판마다 차이가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점수가 나온 것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라며 잊어버렸다.
김연아는 “프리스케이팅에서 신경쓰다 오버하면 실수할 수도 있었다. 그냥 잊어버리고 무시하려고 했다”고 전했다.
프리를 마친 뒤 해냈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던 김연아는 “연습 때 실수없이 연기를 했다. 중요한 것은 한 번의 기회인데 실수하면 억울할 것 같았다”며 “실전에서 연습할 때와 똑같이 했다. 놀라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무덤덤했다”고 밝혔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 김연아는 주니어 시절부터 라이벌로 꼽히던 아사다 마오(23·일본)와 많이 비교됐다.
김연아는 “마오 뿐 아니라 다른 선수들과 비교되는 것 자체가 부담”이라면서 “아사다 선수와는 주니어 때부터 비교를 당하고 있다. 신경을 쓰지 않을래도 쓰인다”고 고백했다.
“절반의 노력, 절반의 재능이 나를 만들었다”
김연아는 당대 최고의 선수이자 세계 피겨 역사에 남을 선수로 꼽힌다. 그는 지난 2010년 밴쿠버동계올림픽에서 쇼트프로그램 78.50점, 프리스케이팅 150.06점 등 총 228.56점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김연아는 “나를 만든 것은 타고난 것이 절반, 노력이 절반이다”고 설명했다.
김연아는 주변에 노력하고, 더 많이 연습하는 선수를 볼 때 자신은 재능을 타고났다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하지만 노력이 없었다면 ‘세계 최고’라고 불리는 김연아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노력이 있었기에 현재의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 재능이 있는 사람도 그것을 모르고 노력을 하지 않다 보면 그대로 수그러들지 않나. 타고난 것을 잘 뒷받침하려고 그만큼의 노력을 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큰 무대에서 떨거나 긴장하지 않는 강심장도 어찌보면 김연아가 ‘타고난 것’일 수 있다. 김연아는 자신이 ‘강심장’으로 불리는 것에 대해 “나도 상황에 따라 다르다”고 강조했다.
김연아는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준비가 덜 됐다고 생각하면 긴장을 많이 한다”며 “2009~2010시즌 그랑프리시리즈 대회 가운데 하나를 망쳤다. 대회를 가기 전에 체하고 아팠던데다 점프도 잘 안됐다. 그 상태로 경기에 나갔는데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아 불안하고 긴장이 됐다”고 설명했다.
그의 강심장 기질은 2010년 밴쿠버동계올림픽에서 전 국민의 기대로 인한 부담감을 딛고 금메달을 따면서 더욱 강해진 것으로 보인다.
김연아는 “대회를 경험하면서 연습한 만큼 실전에서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연습한 만큼 나온다는 믿음이 생겼고, 자신감이 생겼다”며 “그러다보니 긴장도 덜하고 차분하게 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두번째’ 올림픽을 준비하다
밴쿠버동계올림픽이 김연아 인생 제1막 속에 있는 올림픽이었다면, 내년에 있을 소치동계올림픽은 김연아의 인생 제2막에 있는 하나의 장이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아직 새로운 프로그램에 대해 잡힌 계획은 없다. 김연아는 “정말 아무 계획이 없다. 안무가와의 회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김연아는 올림픽 시즌인 2013~2014시즌에도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안무가 데이비드 윌슨과 함께한다.
그는 걱정이 한가득이다. 이번 시즌 프리스케이팅 ‘레미제라블’은 커다란 관심과 함께 좋은 평가를 받았다. 김연아는 “이것을 뛰어넘을 프로그램이 있을지 걱정”이라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그는 2009년을 떠올렸다. 2008~2009시즌 ‘죽음의 무도’와 ‘세헤라자데’를 선보였던 김연아는 이를 뛰어넘는 프로그램을 만들기가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김연아는 “이보다 더 깊은 인상을 남길 프로그램이 있을지 걱정됐다. 보통 윌슨이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데 그때에는 윌슨도 무엇을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래서 오래 걸렸다”고 떠올렸다.
경기력은 ‘현재 유지’가 목표다. 김연아는 이번 대회에서 경쟁자로 꼽혔던 이들을 큰 차이로 제치고 압도적인 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현재의 컨디션과 지금까지 잘 해왔던 것을 유지해야 할 것 같다”며 “여러 대회가 있지만 모든 대회에서 잘하고 싶고, 최선을 다한다. 올림픽일 뿐 하나의 대회다. 올림픽이라고 더 노력하거나 하는 것은 없다. 항상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전했다.
후배들에게 일침 “우물 안 개구리는 안돼”
이번 대회 우승으로 김연아는 후배들에게 귀중한 기회를 안겼다. 김연아의 우승으로 한국은 소치동계올림픽 피겨 여자싱글에서 출전권 3장을 얻었다.
김연아는 후배들에게 기회를 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이번 대회에 출전하기 전부터 후배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했던 그였다.
그는 “올림픽이라는 무대가 한국 피겨 선수들에게 흔하지 않은 경험인데 기회를 줄 수 있어 기쁘다. 선수들에게 큰 대회는 잘하든, 못하든 경험했다는 것 자체로 도움이 된다. 개인적으로도 좋은 추억이 된다”며 미소지었다.
그러나 후배들에게 일침도 잊지 않았다. 김연아가 후배들에게 큰 무대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다는 것은 ‘우물’에서 벗어나라는 의미이기도 했던 것이다.
김연아는 “후배들은 내가 어릴 때보다는 좋은 환경에서 훈련한다. 후배들을 덜 힘들게 해주고 싶지만 후배들이 힘든 것도 알아야 할 것 같다”며 웃었다.
이어 그는 “한국 선수들이 세계선수권대회나 올림픽 같은 큰 대회 경험이 없다보니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부분이 있다”며 “큰 대회에서 보고, 느끼고, 정상급 선수들과 같이 경기하고, 연습해보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한국 선수들은 이런 것이 부족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다시 만난 신혜숙 코치님, 편안하게 해주셔”
지난해 7월 현역 연장 의사를 밝힌 김연아가 누구를 코치를 선임할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컸다. 이미 기술적으로는 더 배울 것이 없는 선수였기에 그랬다.
김연아의 선택은 ‘한국 피겨계의 대모’ 신혜숙 코치와 류종현 코치였다.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미 기술적으로 완성된 김연아는 2년간의 심리적 방황을 잡아줄 사람이 필요했다. 김연아의 어릴적 스승이었던 신 코치와 류 코치는 이에 적임자였다.
김연아는 “신혜숙 코치님은 코치 경험이 정말 많다. 경력도 오래 됐고, 대회 경험도 많다”며 “대회 때, 훈련 때 잘 다뤄 주신다. 다른 코치보다 더 선수를 편안하게 해주신다. 경기 직전 긴장한 것 같으면 편하게 해주신다”고 믿음을 드러냈다.
브라이언 오서, 피터 오피가드 등 외국인 코치와 오래 생활했던 김연아는 “내가 영어를 다 알아들어도 영어로 하는 것보다 한국말로 하는 것이 다르고, 더 편하다. 어릴 적 같이 했던 선생님들이어서 더 편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