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남방주말’ 시위 해결…’리틀 후진타오’ 후춘화, 차기 지도자로 ‘주목’
“中 차기 지도자 후춘화, ‘검열 사태’로 시험대”, “中 ‘남방주말’ 사태 돌파구… 후춘화 광둥성 서기 타협안 제시”, “후춘화 광둥서기 중재에 중국언론 파업 전격 해제”, “후춘화, 신문파업 위기관리능력 일단 ‘합격점’”
중국 언론이 최근 일단락된 중국 주간지 ‘난팡저우머(南方周末, 난방주말)’ 파업 사태의 1등 공신으로 후춘화(胡春?) 광둥성(??省) 서기를 꼽았다. 홍콩 남화조보(南?早?)는 “후춘화 서기의 중재로 광둥성 선전부와 남방주말 편집위원회가 지난 8일 합의에 도달해 남방주말 발행이 정상화됐다”고 보도했다.
후춘화 광둥성 서기는 지난해 11월 20일 쑨정차이(?政才) 충칭시(重?市) 서기와 함께 ‘류링허우(60后, 60년대 이후 출생자)로는 유이하게 25명의 중앙정치국 위원에 선출돼 중국의 차세대 지도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중국 주요 언론은 그가 광둥성 서기로 임명됐을 당시 그를 집중 조명하는 기사를 실었으며 홍콩 언론과 외신은 이번 남방주말 파업사태와 관련해서도 후 서기의 개입으로 사건이 원만하게 해결됐다고 호평했다.
후춘화 서기가 차세대 지도자로 주목을 받는 이유는 뭘까?
1963년 4월에 후베이성(湖北省) 우펑(五峰) 투자족(土家族)자치현의 위양관진(?洋??)에서 태어난 후춘화는 1979년인 16세에 자치현 전체에서 문과 장원을 하고 베이징대학에 조기입학한 수재이다. 우펑투자족자치현에서 베이징대 입학생이 나오기는 후춘화가 처음이다.
베이징대학 중문과에 입학한 후춘화는 과에서도 항상 1~2위를 다툴 정도로 학업성적이 우수했으며 공부뿐만 아니라 학생회 활동을 하며 사회적 관계도 좋았다. 1983년 졸업할 때는 ‘우수졸업생’ 상장을 받았다.
후춘화는 졸업과 동시에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공산당은 ‘수재’ 후춘화를 베이징에 배치하려 했으나 그는 베이징이 아닌 시짱(西藏, 티베트족자치구)를 선택했다. 당시 그의 선택은 관영 신화통신, 인민일보, 중국중앙방송(CCTV)에서 앞다퉈 보도할 정도로 중국 전역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20세에 부임지인 티베트에 온 후춘화는 티베트자치구위원회 조직부 간부를 시작으로 19년 동안 이 곳에 있으면서 자신의 모든 정력을 쏟아 부었다. 1985년 4성급 호텔인 라싸호텔(拉??店) 조성 사업을 맡아 성공적으로 개업시키고 이듬해에는 미국의 유명 관광호텔업체인 홀리데이 인(HOLIDAY INN)의 투자를 유치했다.
1987년에는 린즈(林芝)지역의 행정처를 맡아 이궁(易?) 차 농장을 티베트 지역 최대의 차 농장으로 키워내 지역경제 발전에 공헌했다.
티베트 지역은 민족갈등으로 인해 각종 시위가 끊이지 않는 정치적으로 불안정의 지역이다. 1989년 3월 티베트 수도 라싸에서 티베트인들이 소요 사태를 일으키자, 당시 리펑(李?) 총리는 국부적인 계엄령을 선포했는데 당시 티베트자치구 서기였던 후진타오(胡??)는 계엄령을 집행했고 후춘화는 계엄령에 따라 소요 지역을 일일이 방문하며 성실히 임무를 수행했다.
이 같은 성과를 인정받아 후춘화는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1990년 만 26세에 공청단(共??) 티베트자치구 부서기, 1992년 공청단 티베트자치구 서기로 임명됐으며 1997년 12월에는 부부장급인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로 임명돼 베이징에 입경했다.
베이징에서 4년간 서기 직무를 수행하고 그는 2001년 다시 티베트로 돌아가 5년간 직무를 수행했다. 2006년 공청당 중앙서기처 제1서기로 임명됐으며 2008년에는 허베이성(河北省) 성장으로 임명됐다. 45세에 성장에 임명돼 중국 최연소 성장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성장 임명 후, 1년도 채 안 돼 2009년 11월 네이멍구(?蒙古)자치구 서기로 발령받았다.
그의 이력을 보면 위기관리에 능한 정치인이다. 극도로 긴장된 현장에 뛰어들어 대화로 문제의 실마리를 찾아내는 능력을 보여줬다. 2012년 5월 10일 네이멍구 시린하오터시(?林浩特市) 일대에서 몽골족 유목민 모르건(莫日根)이 광산업체의 석탄채굴과 초원훼손에 항의하다 트럭에 깔려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몽고족은 이에 격분했고 20여일동안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사태가 악화됐지만 후춘화는 물리력을 동원한 해결책이 아니라 현장에서의 대화로 문제 해결책을 찾았다. 후 서기는 시위 현장이었던 학교를 방문해 시위자들과 직접 대화를 했다. 그는 쏟아지는 질문에 끈기 있게 답했으며 자신이 책임지고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그가 직접 나서서 대화를 한 후 몽골족의 시위는 해결됐다. 그리고 지난해 11월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발탁됐다.
중국 언론과 외신은 후춘화를 ‘리틀 후진타오’로 부른다. 둘 다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대학시절 학생회장을 지냈고 공청단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또한 시짱, 네이멍구 등 험난한 지역에서 지도력을 입증하고 후진타오와 마찬가지로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를 지낸 것까지 똑같다.
최근 시진핑(?近平) 새 지도부가 출범한 후, 정부에서 개혁개방의 의지를 강조함에 따라 후춘화 광둥성 서기도 개혁개방의 의지를 다지고 있다.
후 서기도 시진핑과 같이 부임 후, 첫 시찰지로 개혁개방 1번지인 선전(深?)을 택해 지역 경제개발 현황을 집중 점검했다. 선전시의 경제개발 특구인 첸하이(前海), 선전거래소를 방문하고 시진핑 총서기의 첫 시찰지였던 롄화산공원의 덩샤오핑(?小平) 동상을 방문해 헌화하는 등 시찰 내내 “광둥성 발전의 중요 임무는 개혁개방이다”고 강조했다.
더욱이 부임 한 달도 안돼 정부 기관의 검열에 반발해 발생한 ‘남방주말’ 파업사태를 대화로 원만히 해결해 국내외 언론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온바오 박장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