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수 칼럼] 홈런 라이벌 김봉연 선배와의 인연
지난 9월 5일 대구광역시 미술협회 김영호 회장님으로부터 멋진 사진 한장을 카톡으로 받았다. 사진은 1986년 100호 홈런을 치고 3루 작전코치인 정동진 감독님과 얼싸 안고 좋아하던 모습이다.
비록 빛바랜 사진이지만 당시 감격은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때 김봉연 선수와 100호 홈런을 누가 먼저 칠 것인가는 대한민국 장안의 화제였을 정도다.
프로야구 초창기인 1980년대는 호남의 홈런타자 김봉연 선수, 영남의 홈런타자 이만수 선수를 이야기할 정도로 정말 대단했다. 특히 이때는 영‧호남의 홈런왕 맞수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두 선수 대결은 장안의 화제가 됐다.
라이벌(rival)의 사전적 의미는 ‘같은 목적을 가졌거나 같은 분야에서 일하면서 이기거나 앞서려고 서로 겨루는 맞수’다.
대한민국 프로야구가 한국에서 최고의 스포츠로 발돋음 할 수 있었던 첫번째를 꼽으라고 한다면 두 선수의 100홈런 경쟁이었다. 이때만 해도 영호남 라이벌 스토리 하나로도 온 국민의 이슈가 되던 시절이었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1980년대에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만든 이만수와 김봉연의 KBO 최초 100호 홈런 선착 경쟁은 해외 교민들에게도 관심 대상이었다.
당시 언론은 ‘헐크’ 이만수와 ‘촌놈’ 김봉연의 라이벌 구도로 큰 관심을 가졌다. 김봉연 선배와 나와의 인연은 남달랐다. 김봉연 선배 윗동서가 김기수 권투선수였다. 반면 나는 큰 동서가 김기수 권투선수와 둘도 없는 이북 출신 고향친구였다.
아래 글은 이만수 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이 다른 곳에 있는 글을 인용한 것이다.
63홈런 이만수 vs 61홈런 김봉연.
1982년부터 1984년까지 3년간 둘이 기록한 통산 홈런수였다. 그리고 1985년 4월 22일 이만수가 홈런포를 가동하면서 둘의 홈런수는 65개로 똑같아졌다.
영남 대 호남. 해태 타이거즈 대 삼성 라이온즈. 이만수와 김봉연의 홈런 라이벌 구도는 1980년대 중후반까지 프로야구 흥행을 이끈 기막힌 소재 중 하나였다.
게다가 당시 두 팀은 전력적으로 최강이었고, 둘은 초창기 최고의 홈런 타자답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홈런을 때리면서 프로야구 팬을 들었다 놨다 했다.
자연스럽게 ‘누가 최고 홈런타자냐’, ‘누가 먼저 통산 100호 홈런에 도달할까’를 놓고 내기가 끊이지 않았다. 팀의 승패도 승패지만, 그 시절 프로야구는 곳곳에 이런 라이벌 구도와 스토리로 하루하루 야구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1982년 프로야구 원년부터 시작된 김봉연 vs 이만수 홈런 경쟁
1952년생 김봉연, 1958년생 이만수. 나이로는 김봉연이 6살 위다. 김봉연은 연세대 시절까지 검정 고무신에 작업복을 입고 다녀 ‘촌놈’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만수는 괴력의 홈런포를 터뜨리면서 당시 인기리에 방영된 미국 드라마 ‘두 얼굴의 사나이’ 주인공인 ‘헐크’라는 별명을 얻었다.
‘촌놈’은 어릴 때 아파서 초등학교를 또래보다 2년 늦게 입학했다. 일찌감치 투타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1972년 황금사자기에서 대역전 드라마를 펼치며 우승해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신화를 탄생시켰다.
‘헐크’는 대구중 1학년 때 뒤늦게 야구를 시작했다. 그래서 중학교 2학년 시절 1년 유급해 또래들보다 1년 늦었다. 타고난 재능보다는 하루 4시간만 잠을 자면서 피나는 훈련 끝에 정상급 타자가 된 노력형. 대구상고 3학년 시절이던 1977년 청룡기 타격왕에 오르며 우승을 이끌었고,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하며 스타덤에 올랐다.
김봉연은 연세대 1학년 시절이던 1973년 투수로서 대학야구 역사상 최초로 노히트노런(춘계연맹전 고려대전)을 기록하고, 타자로서 대학야구 역사상 최초로 3연타석 홈런(추계연맹전 동아대전)을 기록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실업팀 한국화장품을 거치며 한국을 대표하는 홈런타자로 이름을 날렸다. 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 1979년부터 1981년까지 실업야구 3년 연속 홈런왕을 차지할 정도로 기량이 정점에 오른 상태에서 1982년 프로야구 원년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었다.
이만수는 한양대를 거치며 공격형 포수로 두각을 드러냈다. 대학 1학년 시절이던 1978년 춘계연맹전 타격상, 타점상, 홈런상을 휩쓰는 등 타격에 관한 한 대학 최고의 선수로 우뚝 섰다. 때마침 대학 졸업하는 해에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곧바로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해 전성시대를 맞이했다.
‘이만수’ 하면 떠오르는 것이 KBO 역사상 1호 안타, 1호 타점, 1호 홈런. 1982년 3월 27일 서울운동장야구장(동대문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에서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겼고, 원년에 13홈런으로 홈런 부문 4위에 올랐다.
김봉연은 원년에 시즌 초반 부상으로 주춤했으나 명불허전이었다. 특유의 몰아치기로 22홈런을 기록해 초대 홈런왕에 올랐다. 실업야구 시대와 프로야구 시대를 이어 4년 연속 홈런왕을 차지하면서 김봉연은 대한민국 최고 홈런타자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누구도 밟지 않은 하얀 눈 위의 발자국. 이만수의 KBO 최초 100홈런은 후배들이 자신이 밟고 지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준 하나의 이정표였다.
지금 기준으로는 통산 100홈런이 크게 와 닿지 않을 수 있다. 이미 많은 선수들이 넘어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만수와 김봉연이라는 둘의 라이벌 구도와 치열했던 100호 홈런 선착 경쟁은 우리의 추억 속에 여전히 진한 낭만과 향수로 남아 있다. 그 시절 그게 프로야구를 보는 재미였다.
이만수와 김봉연. 이들은 우리에게 프로야구 초창기 ‘야구의 꽃은 홈런’이라는 사실과 ‘스포츠는 라이벌 관계로 먹고 산다’라는 진리를 제대로 알려준 히어로들이었다. “ ( 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