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②인간조건의 탐구자] 욕망과 두려움
“뭉크의 작품 ‘절규’는 현대문명이 초래한 정신적 공황을 너무나 절실하게 표현한 우리 자화상이며 그래서 그를 우리 시대의 ‘모나리자’라고도 부른다. ‘절규’의 배경은 우리 마음속에 자리한 북구 하늘의 어둡고 칙칙함과 달리 강렬한 적·청·황색으로 비현실적 느낌을 준다. 노르웨이 오슬로의 홀멘콜렌 언덕에서 지난해 12월 7일 오후 3시 45분 석양의 불타는 하늘을 접하기 전까지는 그 색깔들이 뭉크의 상상의 산물인 줄만 알았다.” 최병효 주노르웨이 전 대사가 어느 매체에서 쓴 글이다. 노르웨이 출신의 뭉크(Edvard Munch, 1863-1944)는 현대미술사에 많은 영향을 끼친 표현주의의 거장이다. 지난 5월 22일 시작한 ‘에드바르 뭉크: 비욘드 더 스크림(Beyond the Scream)’ 전시회가 9월 19일(목)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막을 내린다. <아시아엔>은 최병효 전 대사의 글을 세 차례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
[아시아엔=최병효 전 노르웨이대사, LA총영사 역임, <그들은 왜 순국해야 했는가> 저자] 뭉크의 작품들은 주체와 대상, 인간과 주변 환경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는 근본적인 불확실성과 두려움을 시각언어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이래 미술사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라는 ‘절규'(The Scream)는 이러한 붕괴를 시각화한 예로 거론된다.
이를 두고 오슬로대학 미술사 교수 Oivind Storm Bjerke는 이렇게 평했다. “이 작품 속의 인물은 추상적으로 물결치는 선의 유희를 통해 풍경에 침입하고 얽혀 있는 반면, 배경의 두 사람이나 그들이 기댄 길과 난간은 이 파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있다. 즉 가장 예민한 사람만이 인간 주변 환경의 구분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경험할 수 있음을 나타냈다고 볼 수 있다.” :
1892년 1월 22일자 일기와 그 후의 글을 통해 뭉크는 이 작품을 그린 동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두 친구와 (오슬로 인근) 해안가를 걸어 내려가다가 해가 질 때 갑자기 하늘이 피처럼 붉게 변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피로감으로 멈춰 서서 난간에 기대었다. 불과 피의 혀가 검푸른 피오르(fjord) 위로 펼쳐졌다. 내가 공포에 떨 때 친구들은 계속 걸어갔고, 나는 엄청난, 끝없는 자연의 절규를 들었다. 그후 몇 년간 나는 거의 미쳤고 자연이 내 피속에서 절규했고 한계에 직면했다. 그후 나는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렸다.”
뭉크는 이 작품을 네가지 버전으로 그렸는데 1893년과 1895년에 각각 한 점씩의 크레용화와 파스텔화로, 1893년과 1910년에 유화(골판지)로 각 한 점씩과 1895년 석판으로 제작하여 인쇄된 것들이다. 이 중 1893년의 유화(91×73.5cm) 는 오슬로의 국립미술관 소장이고, 1910년의 유화 한 점과 1893년의 크레용화 한 점, 그리고 석판화 (lithograph) 여섯 점은 오슬로시 Munch Museum에 소장되어 있다. 1895년 제작된 판화들 일부는 그가 채색도 하였는데 현재 한국에서 전시중인 작품이 그 중 하나다.
1895년에 그린 파스텔화는 2012년 5월 소더비 경매에서 1억2천만 달러에 팔려 당시 세계 미술품 경매 최고가 신기록을 세웠다. 그 전의 기록은 2010년 5월 4일 뉴욕의 크리스티 경매에서 팔린 피카소의 1932년 작 유화 ‘Nude, Green Leaves and Bust’로 1억6백만 달러였다.
‘절규’도 ‘모나리자’처럼 도난당했다가 회수되어 더 유명해졌다. 첫번째는 1893년 작 유화로 오슬로 북쪽 릴레함메르에서 동계올림픽이 개막된 날인 1994년 2월 12일 오슬로의 국립미술관에서 도난당했다가 1994년 5월 7일 LA Getty Museum의 협조 아래 노르웨이와 영국 경찰의 합동 함정 수사로 회수되었다. 두 명의 도둑은 당시 동계올림픽 축하 전시차 2층 갤러리로 옮겨져 있던 그 그림을 훔쳐가면서 “Thanks for the poor security”라는 메모지를 남기는 여유를 부리기도 했다고 한다.
1910년 작 유화는 오슬로시 Munch Museum에서 2004년 8월 22일 대낮에 무장 괴한들에 의해서 그의 다른 유명 작품인 ‘마돈나’와 함께 도난당했는데 나는 당시 오슬로에서 살던 때라 깜짝 놀랐던 기억이 새롭다. 용의자들은 2005년 4월 체포되어 2006년 5월 3명이 각각 4~8년 형과 1억2천만 달러를 오슬로시에 변상토록 판결 받았다. 그러나 그림들은 오리무중으로 현상금까지 건 끝에 다행히 2006년 8월 모두 회수되었다.
흥미 있는 것은 세계적인 미술품이 도난당해 그 나라 경찰이 회수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런던 경찰국(London Metropolitan Police) ‘미술품 도난과’의 협조를 받아 해결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뭉크는 외적 현실보다는 마음의 상태를 그리려 한 소위 표현주의자expressionist로 분류되는데 초기에는 인상파와 자연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나, 인상파 그림들이 피상적이라고 느끼게 되어 더 깊은 감정과 에너지를 표현하는 방법을 모색하였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영혼의 일기'(Soul’s Diary)에 기록하였는데, 1886년 작으로 누나의 죽음을 그린 ‘병든 아이'(Sick Child)가 첫번째 ‘영혼의 그림’으로 간주되고 있다.
파리 시절부터 시작한 그의 다양한 판화 작업은 750개에 달하는 주제motif를 석판화lithograph, 동판화etching, 목판화woodcut 등으로 제작하여 3만여장이 만들어졌다. 그는 판화를 판매하는데는 별 거부감이 없었던 듯하다. 필자가 오슬로에 거주하며 보니 미술 시장에 그의 판화와 드로잉이 많이 유통되고 있었다. 나는 당시에는 유화에만 관심이 있었기에 그의 판화라도 한 점 사지 못한 것이 후회되기도 한다.
그는 추상화와 함께 모더니즘의 또 다른 중요한 길인 표현주의의 선구자이자 현대 유럽 미술의 대표 주자로서 평생에 걸쳐 작품의 형태, 재료 및 색상에 있어 고정적 예술 규범을 무시했다. 이러한 그의 경험은 모너니티modernity의 상징으로 추앙되고 있다. 나로서는 뭉크는 다빈치나 램브란트와 같이 인간의 깊은 내면을 표현한 신고전주의자neoclassicist로 이해된다. 그의 작품 앞에 서면 베토벤이나 말러 같은 무거운 고전음악을 듣는 기분이 된다. 반면에 같은 modernist라지만 피카소, 잭슨 폴락, 달리, 샤갈 등은 대중가요나 팝송, 칸츄리 뮤직을 듣는 느낌을 준다. 어느 쪽이 좋다고 우열을 가리기보다는 각자의 취향에 따라 감상하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