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권력 앞에 선 사람, 사랑 앞에 선 사람
https://youtu.be/5KvYn2novKw?si=F0ERguR9OGgSprjh다니엘 3장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이르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단 3:28)
감격스러운 순간입니다. 바벨론의 왕이 직접 자기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게다가 느부갓네살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을 너머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조서를 내립니다. 이제 바벨론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언어를 말하는 자가 모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경솔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을 거름터로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더라”(단 3:29)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조서가 내려진 후에 바벨론에 무슨 변화가 있었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이 섬기던 신이 가짜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을까요?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바벨론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국가 인증 마크를 단 또 하나의 신이 추가된 것입니다. Made in Hebrew, 히브리인들이 만든 독특한 신,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 집에 모시는 여러 신들 중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국가가 공인한다고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제도와 시스템에 의해 인증되었다고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인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믿지도 않으면서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기입하고는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줄 착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뿐입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된 이후부터 신앙의 변질이 본격화되었다는 역사적 평가에 우리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강압과 강제, 공권력으로 믿게 할 수 있는 것이 복음이라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마리아가 아니라 빌라도 앞에 나타나셨어야 합니다. 아무 증언 능력도 없는 여인 앞에 예수님이 부활의 몸을 가장 처음 보이신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아무리 효과적이라도 권력적 방법으로는 전해지지 않는 것이 복음입니다. 권력이 개입되면 하나님에 대한 반발심이 길러질 뿐입니다. 사람은 권력 앞에서 반발적이 됩니다. 그러나 사랑 앞에서는 자발적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자발적 선택을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 안에서 경험하는 자발성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