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74주년 인터뷰] 최영하 초대 러시아 국방무관 “6.25 남침 극비문서 발굴 큰 보람”

극비문서 발굴소식을 1면 톱으로 보도한 <동아일보> 1992년 7월 27일자(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아시아엔=조철현 작가] 푸틴 대통령이 24년 만에 북한을 다녀갔다는 보도를 보며 착잡함을 금할 수 없었다고 했다 . 34년 전(1990) 남북고위급회담에 참여했던 사람으로서, 또 초대 러시아 국방무관을 지낸 사람으로서, 푸틴 방북 결과가 충격적이라고 했다. 30여년 전 어려운 여건 속에서 개척했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된 것 같다고 했다. 푸틴 방북이 6.25 발발 74주년 시점과 겹쳐 안타까움이 더 컸다고 한다.

최영하 초대 주러시아 국방무관

초대 주러 국방무관을 지낸 최영하(육사 22기) 전 우즈베키스탄 대사 얘기다. 최 전 대사를 6월 11일 서울 옥수동 자택에 대면 인터뷰를, 이후 19일 푸틴의 북한방문과 18일 주한 우즈벡 비탈리편 대사 순직 이후 전화로 추가 인터뷰를 했다. 

-초대 주러 국방무관 발탁 배경이 궁금하다.

“1990년 9월 4일부터 3박 4일 동안 신라호텔에서 제1차 남북고위급회담이 개최됐다. 국방정보본부 정보전력발전실장(대령)으로 있을 때였다. 북측 김광진 인민군 대장의 안내장교를 맡아 첫 회부터 참여해 3차 회담까지 남북고위급회담 실무진으로 일했다. 그중 2차 회담은 1990년 10월 평양에서 열려 북한을 방문한 바 있다. 1990년 10월은 그해 6월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미국 샌프란시스코 합의에 따라 모스크바에 한국대사관이 처음 개설되던 시기다. 따라서 국방무관 수요가 있었고, 그 자리에 내가 적합하다고 판단됐던 것 같다. 모스크바 북한 대사관 국방무관과 치열한 수 싸움을 해야 되는 곳이니 남북고위급회담 참여 경력이 고려됐으리라 본다.”

-당시 모스크바 분위기는 어땠나?

“1991년 9월 14일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당시는 소련이었다. 따라서 당시 신분은 초대 주소련 국방무관이었다.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권력다툼이 절정을 이룰 때였다. 그해 12월 24일 고르바초프가 물러나고 옐친 러시아 시대를 열며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됐다. 그래서 내 신분 역시 약식 신고 과정을 거쳐 초대 러시아 국방무관으로 변경됐다.

북의 6.25 남침 관련 극비문서를 찾는 데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볼코고노프 장군(좌)과 그의 자택에서 찍은 사진.

-국방무관 시절, 6.25 남침 극비문서를 찾아낸 것으로 안다.

“1950년 당시 북한 주재 소련 대사가 스티코프 장군이다. 6.25 발발 직전인 1950년 5월 30일 스티코프가 김일성과 회합을 했다. 스티코프가 이 회합 사실을 스탈린에게 즉각 암호전문을 보냈다. 핵심 내용은 △북한은 평양 주재 소련 군사고문관 바실리예프 장군과 공동으로 남침 계획을 완성했다. △모든 남침 공격 편성과 준비가 6월 1일경 완료된다. △이미 10개 사단 중 7개 사단이 공격작전 준비를 마쳤다. △7월부터는 우기가 시작돼 6월 말 공격을 개시할 것 등이었다. 이 극비문서를 찾아내 본국에 보고했다.”

-극비문서 확보 과정이 궁금하다.

“옐친 대통령의 군사보좌관인 볼코고노프 장군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볼코고노프는 양심적인 반공투사이자 역사학자였다. 1988년 <스탈린>이란 책을 펴낸 인물로, 그 책이 영어, 독일어, 일어 등 세계 20개국에서 번역 출판되며 스탈린 시대의 부패상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됐다. 또 <트로츠키>, <레닌>, <7인의 초상화> 등 30여권의 책을 저술해 공산당 간부들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파헤쳤던 인물이다. 대부분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비밀문서 접근이 용이해진 틈을 타 쓴 책들이라 사료적 가치가 매우 컸다. 부임한 지 8개월 만인 1992년 5월 <스탈린>의 한국어판 출판을 제안하는 형식으로 그에게 접근했다. 그가 흔쾌히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차제에 6.25 한국전쟁 시기의 스탈린 행적을 보완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점에 대해서도 동의했고, 3개월도 안 돼 그가 6.25 남침 사실의 확실한 증거물인 스탈린의 극비문서를 찾아내 자신의 한국어판 책에 보완했다. 1992년 8월 29일 그와 한국어판 출판계약을 체결했다.”

-비밀문서 공개에 대한 당시 우리 측 반응은 어땠는가?

“1990년대 초반은 일부 대학가를 중심으로 6.25 북침설이 공공연히 나돌던 시기였다. 1992년 7월 이 극비문서 발굴에 대한 기사가 한국 언론들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1992년 7월 27일자 <동아일보> 1면 톱 사례만 보더라도 ‘6.25 남침 소(蘇)서 직접 지시-스탈린 극비 전문 확인’이란 제목 아래 “1950년 6.25 당시 스탈린과 평양 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가 주고받은 긴급 암호전문들이 최근 모스크바에서 발견돼 6.25가 북한과 구소련 및 중국 등의 공산 연합세력에 의해 저질러졌음이 재확인되고 있다”고 쓰고 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6.25 북침설이 힘을 얻지 못하게 됐다.”

-주러 국방무관 시절, 그밖에도 많은 보람이 있었을 것 같다.

“국방무관 시절, 소련의 1945년 이후 대북 군사원조 목록 전량을 입수해 본국에 보고한 것도 큰 보람 중 하나였다. 또 당시 기준으로 가장 최근의 북한 군사 조직의 전투서열을 획득했던 보람도 컸다. 이들 모두 소련이 무너지고 러시아가 출범하면서 자국 신임 국방장관에게 업무보고용으로 만든 자료들이라 사실성과 신뢰도가 높은 1급 정보들이었다. 1992년 11월 옐친 대통령의 한국 방문과 1994년 6월의 김영삼 대통령 러시아 방문 등을 모두 지근거리에서 지켜봤다. 노태우 정부로부터 시작된 북방 정책이 완결되던 시점이다. 당시 북한무관으로 와 있던 김정찬 소장과 가깝게 지냈다. 그가 귀임할 때 통일되면 만나자고 했던 약속이 내 생애 안에 가능할까? 이번 푸틴 방북을 바라보며 회의가 몰려왔다.”

1992년 11월 한국을 국빈 방문하는 옐친 대통령과 만나 인사를 나누는 모습.

최영하 장군은 1943년생으로 육사 22기로 임관해 직후 월남전에 참전했다(1967~1969). 한미연합사령부 비서실 차장(1980~1981) 등을 거쳐 1981년부터 1983년까지 미 육군보병학교에서 파견근무를 했다. 또 국방정보본부 정보전력발전실장(1990~1991) 등을 지냈다. 국방정보본부 근무 당시엔 남북고위급회담 대표단 일원으로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남북회담에 참여했다. 이후 1991~1994년 초대 주러 국방무관으로 근무하며 임지에서 장군(준장)으로 진급했고, 1995년 예편해 주우즈벡 특임대사(1997~2000)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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