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편비탈리 우즈벡 대사…”최후까지 혼신 다한 책임감과 열정 존경합니다”

편비탈리 대사의 마지막 사진. 2024년 6월 14일 우즈벡 국영 <두뇨통신> 인터뷰 당시 찍은 사진이다. 

[아시아엔=최영하 전 주우즈베키스탄 대한민국 대사] 편(片) 비탈리! 그는 77년 생애의 1/3인 25년을 서울에서 보낸 절강편씨(浙江片氏) 편갈송(片碣頌)의 후예다. 한국과 우즈벡을 이어준 직업외교관으로 실로 큰 족적을 남긴 역사적 인물이었으며, 고려인 동포사회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편비탈리 대사 관련 기사를 실은 1988년 9월 8일자 동아일보 기사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그가 한국 땅을 처음 밟은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 때였다.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으로 소련이 어수선했을 때 소련이 극적으로 서울올림픽 참가를 결정하여 한국민들은 들떠 있었고 북방으로 눈을 돌릴 무렵이었다. 소련선수단 부단장이었던 그는 잠실 올림픽경기장 개막식에서 소련선수단 맨 앞에서 소련국기를 들고 행진 입장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41세. 젊어서 복싱 헤비급 선수였던 그는 소련 치하의 우즈벡공화국 체육위원회 부위원장(체육부 차관) 신분이었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고 우즈벡공화국이 독립하여 1992년 한국과 수교하자 카리모프 대통령은 비탈리를 초대 한국대사로 내보냈다. 1995년 그의 나이 48세. 카리모프 대통령 영부인 카리모바 여사의 부친과 비탈리의 부친이 고향 페르가나에서 친구지간인 연도 있었지만, 한국어를 포함해 5개 국어를 하는 보기 드문 고려인 인재여서 적재적소로 카리모프 대통령이 점지한 것이다.

내가 1997년 3월 주우즈벡 2대 대사로 부임했을 때 그는 때를 맞추어 가족과 함께 귀향하여 갓 부임한 한국대사를 우즈벡 정부요인들에게 소개해 주고, 고향 페르가나 마르길란 집에 초청하여 부모님과 여러 유지들이 함께 자리하여 만찬을 베풀어 주었던 기억이 새롭다. 이후 나는 페르가나 출장 시는 호텔에 묵지 않고 그의 부모님 댁에서 유하곤 하였다.

1997년 최영하 대사 부임 직후 사진. 왼쪽 두번째 최 대사, 바로 오른쪽이 편비탈리 대사.

그는 세계에서 보기 드문 대사 재직 기간을 기록했다. 그는 첫 임기 18년을 마치고 귀임했지만 카리모프 대통령 서거 후 미르지요예프 새 정부가 들어서자 2017년 재임용되어 임종 시까지 7년을 더 봉직했다. 모두 25년 간 대사로 봉직했다. 이는 1962-1986년간 냉전시대 주미 소련대사였던 도브리닌(Anatoly Dobrynin)의 기록을 갱신한 것이다.

그가 재직 25년간 이룬 업적은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널리 알려져 있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과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의 정상회담까지 12회에 걸친 양국정상회담을 치르며 많은 성과를 거두는데 큰 역할을 했다.

나는 그의 최근 행적을 생각해본다. 생사의 경지에서 아픈 몸을 이끌고 오로지 책임감 하나로 정상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타슈켄트행 비행기에 올라 장시간 비행을 했을 심경을 헤아리니 가슴이 조여 온다. 물론, 대사로서 감당해야할 임무였다. 하지만 그는 쉬었어야 했다. 생명보다 귀중한 건 없지 않겠는가.

원도연 우즈벡 대사가 19일 안장식 참석해 유족과 지인들을 위로하고 있다. 

그는 정상회담을 마치고 야윈 몸으로 현지 국영통신과 인터뷰를 했다. 그 공적인 행적을 마지막으로 사흘 후 눈을 감았다. 고향에 가서 생을 마감했으니 편안한 마음으로 영면했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혼신을 다해 임무를 수행한 고인의 투철한 책임감과 열정에 고개가 숙여지고 숙연해질 뿐이다.

타슈켄트로 떠나기 하루 전, 업무 마치고 돌아오면 만나자 했던 그와의 약속이 귓전에 맴돌고 있다. 3년 전 먼저 떠난 사랑하는 부인 루다의 곁에서 영원한 안식과 명복을 빈다.

2024년 6월 19일

전 주우즈벡 대사 최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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