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조르바’ 남상천씨 “지독한 겨울 눈·눈·눈···그래도 나는 자유”

그의 등에는 늘 짐이 얹혀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다지 않고 짐을 지고 뚜벅뚜벅 걸어왔다. 무겁게 연속 다가오는 그 짐은 그의 너털웃음과 함께 가볍기만 할 것이다. 깃털처럼…

산골마을로 들어와 사는 사람들은 폭설로 마을과 읍으로 나가는 길이 막힌 현실이 실감이 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귀촌한 지 10년이 된 친구는 이런 눈을 처음 경험한 일이라고 했고, 20년 조금 넘은 사람도 이런 눈은 20년 만에 처음이라고 중얼거렸다. 일주일이 넘도록 내리는 눈은 마을 사람 각자에게 놀랄 만한 경험을 씁쓸한 추억으로 남겨주었다. 눈보라 속에 매서운 겨울바람이 사정없이 불어댔다.​

이 길 따라 다니던 임계 5일장은 큰 눈으로 안내도 없이 흐지부지 지나갔다.  <사진 김영준>

발목을 넘어 정강이까지 빠지는 눈에 산속에 사는 사람들 일상은 갑자기 정지된 듯했다. 읍면 마을 곳곳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이 모처럼 만나 안부를 묻고 소식을 듣던 5일장은 특별한 안내도 없이 흐지부지 지났다. 다들 자연스럽게 ‘이런 날씨에 누가 장터에 나오겠느냐’ 싶은 촉이 발동했던 모양이다. 마을 장터의 공간이 휑하니 부는 바람으로 더 스산했다.

​서울을 떠난 후 서너 해가 지났을 무렵 처음 만났던 그는 눈에 띄게 얼굴 모습이 바뀌어 있었다. 천성이 차분하게 앉아 일하는 것을 불편해 하던 그는 손대는 사업마다 ‘IMF 사태’ 같이 자신이 어쩌지 못하는 환경으로 인해 좌절을 겪거나 또 때로는 사람을 잘못 만나거나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이 부족해 뼈아픈 후회를 경험했다.

그가 경험한 혹독한 시간을 아무 죄 없는 가족 모두가 온전히 공유해야 했다.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 가던 무렵 그는 늘 가슴 속에서 충동질하던, 서울을 더 늦기 전에 떠나야겠다는 욕구를 불현듯이 실천에 옮겼다. 실천이 덕을 본 것인지 오랜만에 본 그의 얼굴은 모처럼 환한 미소와 함께 좋아 보였다.

카잔차키스의 묘비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 “나는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다. 나는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이 글에 등장하는 그의 삶이 바로 그렇다. 사진은 그가 사는 임계면 산자락 지난 2월 어느 눈 많이 오던 날 풍광.

그가 정착한 곳은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의 산자락이다. 마을이 700 고지 높이로 서울에서는 웬만한 산 등산 코스의 꼭대기쯤이었으니 정착하는 날부터 소위 ‘자연인’이 된 셈이다. 아무런 연고도 없던 그곳에서 그는 초라한 움막을 짓고 살림터로 삼았다. 이웃이라야 산자락에서 200여 미터를 내려가 도로가 나오는 곳에서 또 그만큼을 올라가야 하는 마주 보이는 산 저 멀리에 농가 서너 채가 전부였다.

거기에서 그는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마시고 밥을 짓고 하루하루를 보냈다. 늦겨울과 초봄의 경계 무렵에는 고로쇠 물을 채취하기 위해 산속을 헤매고 다니기도 했고 여름에는 능선을 오르내리며 약초를 캐면서 계절을 보냈으며 가을 단풍의 찬란하면서도 처연한 풍경을 만끽하다가 어느 순간 다가온 혹독한 겨울을 순리로 생각하며 시골생활 몇 해를 보냈다.​

매일 아침 얼굴을 맞대고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그의 딱한 처지를 알고 지인이 가져다 준 풍산개 한 쌍이었다. 그는 아침마다 개와 함께 노래를 부르거나 어릴 적 배워서 기억하고 있는 이미 구판이 되어 버린 ‘국기에 대한 맹세’나 ‘국민교육헌장’을 낭독해주며 개들이 자신처럼 시절을 낭비하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했다.(본문 가운데) 

매일 아침 얼굴을 맞대고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그의 딱한 처지를 알고 지인이 가져다 준 풍산개 한 쌍이었다. 그는 아침마다 개와 함께 노래를 부르거나 어릴 적 배워서 기억하고 있는 이미 구판이 되어 버린 ‘국기에 대한 맹세’나 ‘국민교육헌장’을 낭독해주며 개들이 자신처럼 시절을 낭비하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어느 해 갑자기 그는 산골에서 소위 말하는 ‘어공’이 되었다. 강원도로 떠난 후 몇 해가 지난 후 그가 친구들에게 안부를 전해왔는데 뜬금없이 자신이 공무원이 됐다는 기별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노량진 학원가 부근에서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밤낮 가리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 TV를 통해 종종 방영되던 시기라 소식을 듣고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당당한 자세로 완장을 찬 사진을 보내오면서 진실이 이해되었다.

그의 집 건너 마을 풍광. 산골 마을은 눈이 많이 내리면 고립되기 일쑤다. 

산불진화원

마을 이장의 추천을 받아 우연히 응시한 산불진화대원 시험에 그가 덜컥 합격한 것이다. 산불이 빈번한 강원도 지역이라 비록 한시적으로 봄철 몇 달만 일하는 형태였지만 자신도 놀랄만한 결과였다. 그래도 중앙정부 부처 중 한 곳인 산림청이 주관하는 시험에 합격한 것 아닌가. 그는 특히 그 점을 강조하며 자랑스러워했다.

진상은 이랬다. 귀촌 인구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고는 하나 젊은이들이 고향을 등지고 서울이나 대도시로 떠나는 이촌 현상으로 지역이 비어 가는 현실에서 그래도 낯선 곳으로 찾아든 이방인을 홀대해서는 안 된다는 게 동네 이장의 따뜻한 속마음이었으리라. 게다가 인물도 훤하고 성실한데다 제법 단단한 체격을 보유한 인물이니 이장도 추천을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검증과정에서도 그는 다른 경쟁자들을 압도했다.

서울 출생의 그는 공수특전사에서 직업군인으로 장기간 복무하였고 서울에서 대학까지 졸업한 터여서 이장뿐 아니라 면접관들의 마음에도 흡족한 인물이었다. 서류나 면접뿐 아니라 그는 체력 검증에서도 평생 농사를 짓던 토박이들을 압도했는데 15kg 되는 자루를 메고 1.2km 거리의 선착순 테스트에서 당당히 2위로 들어왔다. 정선군 임계면의 어느 산자락에는 50~60대 1의 경쟁을 뚫고 제법 그럴듯한 모습을 뽐내는 산불진화대원이 오늘도 근무하고 있다.

​아내는 서울에서 자녀들을 돌보며 대부분 시간을 보내고 있고 산속에서는 그가 홀로 지낸다. 지난 해 딸아이를 결혼시키느라 서울에 들른 것 말고는 그는 자신을 그렇게 고립시킨 채 지낸다. 아이들과는 드물게 통화를 하며 자신에게도 가족이 있음을 확인한다. 간혹 지인들이 동해안 바닷가에 놀러왔다가 그를 찾는 경우에 말벗 없이 고독했던 그에게 잠시지만 대화 상대가 생기기도 한다.

지난 겨울 그와 모처럼 오랜 시간을 같이 지냈다. 폭설 때문이었다. 첫날 큰 솥에 끓여놓은 옻닭은 마침내 솥의 국물이 마를 때까지 세끼를 내리 먹어야 했다. 문 앞까지 잔뜩 쌓인 눈을 헤치고 나가서 할 수 있는 다른 선택 방안이 없었다. 종일 내리는 눈으로 큰 길가로 나가기 위해서는 눈을 쓸고 길을 내어 나가야 했고 읍에 나가서 식사라도 하고 올라오는 길에는 다시 눈을 쓸며 집으로 들어와야 했다. 일주일 넘게 내린 눈으로 집은 고립되었고 산골 마을은 눈에 파묻힌 채 그저 고요하게 존재했다.

​산골 이곳저곳에는 그와 처지가 비슷한 사내들이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왜 편리한 도심의 주거환경을 떠나 산속을 찾아간 것일까. 그들은 왜 산속에서 가족을 그리워하면서도 고립된 일상을 고집하는 것일까.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거기에는 가장이라는 이유로, 또 남자라는 이유로 평생을 등에 메고 있던 무거운 짐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지고 싶은 생각이 바탕에 있지 않았을까.

남자의 등에는 늘 짐이 얹혀있었다.

남자라는 이유로 아무리 슬퍼도 울거나, 가볍게 보이도록 소란스럽거나, 분별없이 자제력 없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규범적 짐이 작은 아이일 적부터 등에 얹혀 있었다. 사내답지 못한 행동을 함으로써 가족과 이웃에 실망을 끼쳐서는 안 된다는 주변의 생각도 거기에 더해졌다. 청년이 되어서는 국방의 의무라는 큰 짐을 기꺼이 지고 ‘사내스럽게’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성장해서 사회에 진출하고 곧이어 가정을 꾸리게 되면 남자에게는 ‘가장’이라는 새로운 짐이 얹힌다. 이 짐은 무겁기도 할 뿐더러 지고 가야 할 종착지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고도 험하다. 가장이라는 짐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가정의 지탱을 위한 경제적인 짐, 아이들을 훈육시키고 놀아줘야 하는 아빠로서의 짐, 집안의 대소사를 챙겨야 하는 남자로서의 짐도 감당해야 한다.

​직장에서는 늘 예기치 않은 상황에 위와 아래를 동시에 살피며 순발력 있게 적응해야 하면서, 가정에서도 역할 분담이라는 간단치 않은 과제를 성실하게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평생을 얹혀있던 큰 짐을 훌훌 털어내고 산으로 떠난 사내들의 사연은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때로는 변명이나 아집으로 비칠 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들은 더 이상 그런 편견에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그저 살아오면서 가슴 깊은 곳에서 억누르고 있던 답답함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진 것에 만족하는 것이다.

시골 도로는 눈 속에서도 더디지만 꿈틀거린다. 요즘 벚꽃이 한창이리라.

그들 누구도 그리스를 방문해 본 적도, 그리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명저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은 기억은 없지만 깊은 산 속에서 그들은 “나는 자유다”라는 외침을 부르짖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대화를 하면서 뜻밖에 그의 사고 폭이 예스럽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연 속에서 계절의 변화와 더불어 깊이 사색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져서 그렇게 된 것일까.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점차 세상의 이치를 터득하고 있는 모양이다. 긴 산골마을의 겨울이 가고 봄꽃이 피면 그는 시인이 될 것이다. 한 여름에는 자락에 일궈놓은 작물들을 돌보며 가을의 수확을 기다릴 것이다. 겨울도 저절로 오는 것이니 특별한 준비가 필요할 것 같지 않다.

​카잔차키스의 묘비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 “나는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다. 나는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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