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왜 교인들끼리 고소 고발할까?
고린도전서 6장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전 6:7)
작은 사업을 하나 시작해도 사업 파트너와 어려움이 생기고, 대학에서 조별 과제 하나를 하더라도 그 안에 별별 일이 다 일어납니다. 심지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녀와의 관계에도 갈등이 생깁니다. 교회라고 분쟁과 갈등이 없을까요?
중요한 것은 그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입니다. 한 개인이, 한 가정이, 한 회사가, 한 교회가 그 내부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가는지를 보면 그 사람과 그 공동체가 무엇을 가치있게 여기는 지가 드러납니다.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어야 하는 부분은 바로 문제 해결방식입니다. 문제가 안생겨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문제를 풀어가는 다른 방식 때문에 구별되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도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누군가를 법정까지 끌고 갔다는 것은 갈 때까지 갔다는 의미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되도록이면 법정까지 가는 일은 피하려고 합니다. 왜 합의를 하겠습니까? 소송 중에 겪어야 하는 극심한 스트레스와 피말리는 심리적 압박, 그리고 시간적, 금전적 손해가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두 사람이 법정까지 간다는 것은 내가 손해를 보고서라도 너를 이기고 말겠다는 지독한 결단이 서야 가능한 일입니다.
바울은 성도라는 사람들끼리 그런 결단을 내렸다는 것에 몹시 화가 났습니다. 그렇다고 재판의 결과가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해주는가? 그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재판에 승복하는 이유는 재판 결과를 용납해서라기보다 더 이상 항소할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4심, 5심이 있다면 거기까지 가서라도 이전 판결을 뒤집고 이기고 싶은 게 사람 마음 아닐까요?
갈등과 분쟁은 누군가가 스스로 십자가를 져야만 해결됩니다. 예수님께서 왜 재판관이 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지셨겠습니까? 시시비비하면 시비 걸 일만 생깁니다. 누군가가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분쟁은 근본적으로 종결되지 않습니다.
소란스럽지 않은 공동체, 화목한 가정이 있다면 문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누군가가 십자가를 지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왜 평화의 왕이라고 하는지 생각해 봐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