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쌍용그룹 김석원 전 회장 2011년 인터뷰
[아시아엔=최보식 ‘최보식의 언론’ 편집인]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78)이 26일 별세했다. 김석원 쌍용회장이라고 하면, 쌍용그룹, 재계 6위, 쌍용자동차, 성곡문화재단, 사과상자, 해병대, 고성잼버리, 용평스키장 등의 단어가 떠오를 것이다.
평창동계올림픽을 유치했던 12년 전(2011년), 나는 ‘칩거 중’ 인 김석원 전 회장을 인터뷰한 적 있었다.
그는 ‘평창 동계올림픽’의 숨은 공로자였기 때문이다. ‘리프트’가 뭔지도 모르는 시절에 그가 용평스키장(1974년)을 만들지 않았다면, 당시 4000명도 안 됐던 스키인구를 600만 명으로 늘려놓지 않았다면, 우리나라에서 동계올림픽은 열릴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쌍용그룹을 잃었고, 그 즈음 아들까지 잃었고, 더욱이 자신은 폐암 등 여러 병마로 싸우고 있었다.
인터뷰는 젊은 날 그의 군대 얘기로 시작했다. 그는 월남전에도 참전했다.
―해병대 사병으로 자원입대했다. 공화당 실력자에 기업인인 김성곤(金成坤)의원을 아버지로 둔 쟁쟁한 집안에서 왜 그랬나?
“집안 좋으면 해병대 못 가나. 미국서 공부하고 돌아와 빨리 병역의무를 마치고 싶었다. 육군의 징집영장을 기다리느니 자원입대한 거지. 많이 맞았다. 월남전서 수색중대원으로 10개월 했으면 알 것 아닌가.”
―용평스키장과 인연이 된 것은 월남전 파병 명령을 받고서 2주일 휴가를 나와 돌아다닐 때(1971년 1월)라고 들었다.
“강릉에서 서울로 돌아오는데, 내가 갖고 있는 지도에 ‘대관령 스키장’ 표시가 있었다. 한국에서도 스키를 타고 있구나 했다. 연탄불 때는 대관령 산장을 찾아가 묵었다. 주인에게 ‘스키장이 어디에 있나’ 물었다. 무슨 엉뚱한 질문이냐는 표정으로 ‘여기저기 눈 있고 경사진 데가 스키장이지’ 했다. 일년 뒤 제대하고서는 아버지 회사에서 일했다. 나는 책상머리에 앉아 있는 게 너무 답답했다. 그러다가 대관령이 떠올랐다. 주말마다 지프를 몰고 스키장이 될 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희한하게 길을 잘 찾는 능력이 있다고 들었다.
“나는 지도만 있으면 처음 가는 길도 다 찾아간다. 선천적으로 지리감(地理感)을 타고났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의 자가용 운전사가 모르는 곳에 심부름 가면 나를 길잡이로 태워갔다.”
―스키장을 하면 돈이 되겠다는 사업가적 직감이 들었나?
“그걸 생각했으면 못 했지.”
―사업가가 돈이 아니라면 무엇을?
“사업보다는…, 스키를 메고 30분간 걸어 올라가서 30초 만에 타고 내려오는 걸 보면서, 왜 우리나라에서는 안 되느냐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스포츠를 좋아해 유학 시절 스키를 타곤 했다. 우리도 산이 있고 겨울이 있고 눈이 있는데 왜 안 되느냐, 내가 한번 만들어보자는 오기가 생겼다.”
―맨손으로 스키장을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닐 테고.
“선친은 ‘자식에게는 절대 유산을 안 물려주고 간다’고 했다. 그러면 돈은 돈대로 없어지고 자식은 자식대로 버린다는 것이다. 내가 선친과 담판을 지었다. ‘유산 안 물려주신다는 건 알겠는데 정말입니까?’ 선친이 가만히 계셨다. 나는 단도직입으로 ‘그러면 투자 좀 해달라’고 했다. 그때 자본금으로 2억원을 받았다.”
―쌍용그룹을 물려받았지 않았나?
“물려줘서 받은 게 아니라, 선친이 갑자기 돌아가셨다(1975년). 장남인 내가 책임을 지게 된 것이다.”
―스키장을 하겠다고 했을 때 선친의 반응은?
“주위 사람들에게 ‘아들놈이 스키장에 미쳐 있는데 되겠나’라고 했다.”
―김 회장도 사업성을 판단했을 것 아닌가?
“일본과 미국 상황으로 볼 때는 된다고 봤다. 당시 일본의 스키인구는 약 1000만 명이었다. 우리도 소득만 향상되면 스키인구가 늘 것으로 예상했다. 다만 정착하려면 20~30년은 걸릴 것으로 봤다.”
―김 회장이 처음으로 국내에 제설기(製雪機), 리프트 등 스키장 설비를 들여왔다고 들었다.
“대관령 측후소에서 적설량 데이터를 뽑아 보니, 생각보다 눈이 많이 오지 않았다. 세간에서는 30cm쯤 오면 ‘대설’이지만, 스키장 입장에서는 그걸로 스키를 못 탄다. 적어도 1m는 와줘야지. 유럽·일본·미국은 한번 오면 이틀 사흘씩 오고, 2~3m 쌓인다. 국내에서는 스키가 눈을 훑어버리면 돌과 흙이 나온다. 눈 만드는 기계로 맨바닥에 30~40㎝쯤 눈을 깔아줘야 한다. 20만달러 차관을 얻어 리프트 2기, 이동용 제설기 4대, 설상차(스노모빌) 등을 사들여왔다.”
―새로 들여온 스키장 설비에 대한 규정도 안 갖춰졌을 텐데.
“규정은 커녕 리프트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공무원이 뭐냐고 물었을 때 설명하기 어려웠다. 당시 찾아보니 강원도 영월 광산에서 리프트 모양으로 석탄을 나르는 게 있었다. ‘그 속에 석탄 대신 사람이 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렇게 법규를 하나씩 만들었다. 하지만 규정의 미비점이 계속 생겼다. 리프트 속도는 탈 때 느려지고 타고나면 빨라진다. 속도가 빨라지는 것도 규정 위반이었다. 또 2인승은 되지만 3·4인승은 규정에 없다고 했다.”
―용평 리조트 부지는 약 520만 평인데, 이는 어떻게 확보했나?
“자본금 2억원으로는 땅부터 사들이기 시작했다. 대부분 감자, 옥수수밭이었고, 40호의 민가가 있었다. 주민들은 봄에는 들어와서 농사짓다가 수확 뒤에는 나가 살았다. 스키장을 개발하면서 부지를 확보하려고 했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선친께는 혼났다. 땅만 산다고. 땅 사는 것을 부동산 투기로 여겨 굉장히 싫어했다. ‘쌀 때 사두고 비쌀 때 팔면 천하의 반역자’라고. 사실 서울 인근의 대모산에도 스키장을 하나 더 지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선친 앞에서 또 땅을 산다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용평스키장 개장 첫날은 어떠했나?
“1974년 12월 21일 임시개장을 했다. 노란선, 빨간선 두 개의 슬로프로 시작했다. 손님을 모셨는데 밤에 정전이 됐던 기억이 난다. 그 뒤로 서울 인근에 스키장들이 생겨나면서 주말 야간 스키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김 회장의 스키 실력은 어느 수준인가?
“어떤 슬로프든 다 내려온다. 하지만 7년 전 용평스키장에서 손 떼면서 안 타러 간다.”
―그런 용평스키장도 매각하고, 한때 재계 서열 6위 그룹의 패망 원인은 어디에 있었나?
“부채가 있었지만 못 갚을 정도는 아니었다. 승용차 시장(쌍용자동차)에 진출하면서 손해 보는 계약을 한 것도 문제였다. 무엇보다 IMF가 결정적이었다. 하지만 회사의 패망은 아니다. 우리 그룹의 회사는 그대로 살아있다. 나는 ‘기업인으로서 회사를 부도내는 걸 죄악’이라고 배웠다. 내 가진 것을 다 털어 넣어 회사는 살려놓았다. 비록 내가 경영을 안 하고 남이 하더라도 말이다.”
―비록 지금 어려운 처지이지만, 이 자리에서 ‘신정아 사건’과 관련된 질문을 안 할 수 없다. 당시 특별사면 부탁을 위해 신정아에게 2000만원을 건네줬다는 소문도 돌았다.
“나는 공탁금 50억을 내고 보석됐다. 신정아 사건은 쌍용그룹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집사람도 그렇고, 성곡미술관도 피해자다. 검찰에서 내가 마치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 어떤 거래가 있는 걸로 보고 수사했다. 아무 것도 나오지 않으니, 과거 회사 문제를 다시 끄집어낸 것이다.”
―검찰이 자택을 압수수색했을 때 80억원 상당의 수표와 현찰이 발견돼 화제가 됐다.
“이는 회사 정리를 하고, 연말에 낼 세금과 개인적으로 소유한 자투리 주식 등을 처분한 돈이었다. 자금 출처가 분명하기 때문에 문제 될 게 없다. 검찰이 추징했으나, 지금은 생각하기도 싫어 잊으려고 하고 있다.”
―김 회장은 해병대 자원입대, 성곡언론문화재단 운영, 보이스카우트연맹 총재 등으로 좋은 이미지의 기업인이었다. 그런데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을 대신 보관해준 것이 드러나 안타까웠다.
“당시 기업 총수치고 전직 대통령 비자금을 안 맡아준 이들은 없었다. 나 같은 사람은…, 마치 흰 저고리에 검정물이 떨어지면 금방 검어지는 것이 아닌가.”
―앞으로 어떤 삶을 계획하고 있나?
“나는 할 것을 다 해봤기 때문에 다른 욕심이 없다. 선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나는 만 서른 살에 기업을 맡았다. 기업을 내 개인 것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고, 똑바로 끌고 가는 것이 내 책임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30년쯤 일했다. 이제는 편히 쉬어도 되지 않나 싶다.”
2020년 그의 집에서 다시 만났다. 그는 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많이 늙어보였다. 실내에서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거의 외출이 불가능한 몸이었다. 주로 침대에서 TV와 인터넷을 보며 하루를 보낸다고 했다. 그는 체념한 듯 초월한 듯 그런 자신의 몸에 대해 무심한 것 같았다.
삼가 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