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이문열 이어 ‘내 새끼 지상주의’ 비판 김훈에까지 언어 테러
“하얼빈역에서는 옴과 감이 같았고, 만남과 흩어짐이 같았다…” 작년 출간된 김훈 작가의 <하얼빈>에 나온다. 김훈 문장 치고는 길다. 그러나 장소 부사 외, 주어 동사만 있다. 분칠을 하는 꾸밈말을 그는 극도로 절제한다. 그래서 뼈대와 꼭 필요한 살만 붙여 구성한다.
어릴 때부터 김훈은 혼자 놀기 좋아한다. 그가 태어나던 해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북에는 조선인민공화국이 수립된다. 우리 현대사와 김훈의 생애가 딱 들어맞는다. 세살 때 6.25가 났다. 집은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부산에서 유년기를 보낸다. 전쟁 후 바로 서울로 오지 못하고 부산에서 초등 저학년까지 다녔다.
김훈의 회고. “당시 내 중요한 일과는 미군부대에 가서 초콜릿을 얻어먹는 거였어요. 미군 지프차를 따라가면서 ‘헬로, 쪼코렛, 기브 미 쪼코렛, 예스 오케?’ 하면 미군들이 초콜릿을 던져줬죠.” 그 시절, 초콜릿 하나 들고 일가족이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니 믿기지 않는다. 김훈은 주로 미군부대 앞에 가서 얻어먹었다.
부대 철조망 앞에는 남루한 차림의 50명쯤이 늘 지키고 있었다. 미군이 보초를 서려고 나왔다 초콜릿을 던져준다. 아이들이 “기브 미 쪼코렛, 쪼코렛” 합창을 한다. “미군이 하나를 왼쪽으로 던져요. 그러면 애들이 왼쪽으로 확 몰리죠. 그다음은 오른쪽. 그러면 또 오른쪽으로 애들이 구름처럼 몰려가요. 다음에는 멀리, 그다음에는 가까이 던지면 애들이 막 갈팡질팡…”
그렇게 초콜릿 얻어먹고 쌍팔년도를 산 김훈이다. 그의 묘사는 피부에 닿는다. “나는 한 개씩 던져줄 때는 잘 움직이지 않다가 통째로 날아올 때를 기다렸어요. 그 초콜릿 박스가 어디에 떨어지는가를 잘 판단했다가 떨어지는 지점에 슬라이딩을 해서 잡았죠. 마치 야구선수가 홈으로 들어오듯이 먼지를 일으키며 슬라이딩을 해서 잡는 거죠.”
당연히 그것을 잡자마자 냅다 집으로 뛰었다. 그러면 잘했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했다. 그 시절 우리는 가난했다. 하지만 그 가난은 시대 전체의 가난이었다. 누구도 초콜릿을 얻어먹는 게 수치스럽지 않았다. 김훈은 “오히려 나는 그 당시 장면을 떠올리면, 초콜릿이 날아오는 방향에 따라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애들의 그 발랄한 생명력이 참 아름답다”고 추억했다. 오히려 던져주던 자가 나쁜 놈이란다. “예절을 잃은 거예요. 물건을 남한테 줄 때의 예절을 잃은 거죠. 나는 다만 배가 고팠을 뿐이지, 그것이 무슨 치욕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이가 더 들어도, 김훈은 혼자 놀기를 좋아한다. 7순 초반, 지긋한 나이에도 여전히 그리 지낸다. 그의 지론은 과학적으로 보고 인식하자는 거다. “어떤 현상을 보면, ‘이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왜 이런가’, ‘이것과 저것과의 관계는 어떤가’를 질문하지 않고, ‘이것은 내 마음에 드나 안 드나’, ‘이것은 내가 보기에 아름다운가 추한가’, ‘이것은 나한테 이로운가 해로운가’, ‘이것은 나한테 이로운가, 저놈한테 이로운가’, ‘이것은 내 적한테 이로운가, 내 적의 적한테 이로운가’를 생각하죠.”
인간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저 인간은 내 편인가 아닌가’부터 본다. ‘저 사람은 내 편은 아닌 것 같은데, 내 적의 적인 거 같으니까 내 편이 될 수도 있겠다.’ “이따위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이 세상을 이해할 길이 없어요.”
김훈은 보기와 달리, “이 세상에 대해서 과학적 질문을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야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갖는다고 했다. 우리 4류 정치꾼들이 귀를 기울여야 할 대목이다. 문학 역시 과학이라고 정의한다. “세상에 대해서 문학적인 질문을 한다는 것은 그 세상을 과학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죠. 심미적으로 이해한다기보다는…”
그런 김훈이 허공으로 올랐다 내동댕이쳐졌다. 단 두 줄의 조국 전 법무장관 일가를 비판한 문장 때문이다.
그 바람에 ‘개딸’ 등의 공격 타깃이 됐다. “김훈의 책을 갖다 버리겠다”고 목청을 높인다. 20여 년 전, 작가 이문열에게 가해진 ‘홍위병 논란’을 연상시킨다. 김훈은 “할 말이 없다”고만 할 뿐이다.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32년 전, 류는 다르지만 김지하에게 자행된 테러다.
1991년 4월 명지대생 강경대 사망사건을 계기로 그해 연쇄 분신 파동은 충격이었다. 김지하는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글을 썼다. 지하는 70년대 후반 옥중에서 생명사상에 깊이 빠졌다. 목숨을 초개처럼 여긴 분신을 저주의 굿판에 빗댔다. 이 글에서 김지하는 통탄하고 슬퍼했다. “자살은 전염한다. 당신들은 지금 전염을 부채질하고 있다. 열사 호칭과 대규모 장례식으로 연약한 영혼에 대해 끊임없이 죽음을 유혹하는 암시를 보내고 있다.”
일부 세력들이 연쇄 자살을 은연중 부추기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죽음을 강요당했던 자신의 과거 경험도 슬쩍 자락을 깔았다. 그 글의 후폭풍은 엄청났다. 김지하를 동지로 여겼던 운동권이나 좌파 진영의 충격도 지대했다. 김지하가 그들을 매도하며 독재에 아부한다고 격렬하게 반발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는 그를 제명했고, 좌파 진영에선 변절자로 규정하고 관계를 끊었다. 일부 재야나 좌파 문인은 사적 만남조차 뿌리쳤다. 그때의 광기가 서늘하게 느껴진다. 물론 김훈에겐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김훈은 지난 8월 4일자 <중앙일보> 1면에 ‘내 새끼 지상주의의 파탄…공교육과 그가 죽었다’는 글을 실었다.
서이초등학교 교사의 죽음을 ‘내 새끼 지상주의’가 빚은 비극이라며 통탄했다.
“‘내 새끼 지상주의’를 가장 권력적으로 완성해서 영세불망의 지위에 오른 인물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그의 부인이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소행이 사람들에게 안겨준 절망과 슬픔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딱 이 2문장 탓으로 김훈을 마구 두들겼다. 고위 공직자 등 기득권층의 ‘내 새끼 지상주의’를 지적한 게 뭐가 잘못됐나 말이다. 공동체 가치는 파괴됐고, 공적 제도와 질서는 빈껍데기가 됐다고 해서인가?
“참으로 맞는 말 아닌가?” 말이다. 200자 원고지 22장 분량의, 기고문 중에 조국을 언급한 대목은 단 두 문장, 80자도 안 된다. 기고문은 ‘내 새끼 지상주의’를 비판하며 우리 사회의 각성을 촉구하는 데 집중했다. “노망 났다” “절필하라” “더위 먹었냐” SNS에 인신공격과 폭언이 쏟아졌다. 한 사립대 교수는 “김훈이 전두환 정권에 부역하고 재벌을 찬양했다”고까지 몰아세웠다. 한 기자는 “조국 가족을 향한 난데없는 칼부림이 드러낸 김훈의 민낯”이라고 했다. 김훈의 <하얼빈>은 문재인 전 대통령의 추천도서이기도 했다.
조국은 과연 성역인가? “집단 린치가 꼴사납다”는 목소리가 진보진영쪽에도 들린다. 여기에다 검찰이 조국 딸을 기소하자 민주당 지도부부터 발끈했다. “멸문지화를 시키니 윤석열 정권, 시원한가?”(정청래) 민주당은 ‘조국의 강’을 건너지 못하고 더 깊이 빠져든다.
조국 일가의 재판을 본 심경을 김훈은 슬퍼게 토로했다. “인간의 가장 고귀한 인연인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미망일 수가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나 자신의 무명과 마주 대하고 있었다.”
김훈은 이어 “새내기 여교사의 죽음과 전국 교사들의 조문 사태가 한 시대의, 우리 전체의 통렬한 반성을 요구한다”고 절규했다. 정부가 내놓은 ‘해법’도 통렬하게 비판했다. 김훈이 싫어하는 형용사들 중 ‘정당한’을 콕 집었다. “정부가 내놓은 ‘해법’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아동학대처벌법을 고쳐서 ‘정당한 지도 행위는 신고하거나 처벌하지 않는다’라는 취지의 조항을 신설하자는 것이다. 여야는 이 법안에 대해 의견이 접근해 가고 있다고 여러 매체가 보도했다. 이 법안이 ‘해결책’으로 내세우는 ‘정당한’이라는 한마디의 형용사는 며칠 전 야당이 방탄 국회라는 비난을 벗어나기 위한 개혁안을 발표하면서 ‘정당한 영장청구에는 면책특권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정한 것과 똑같다. 이것은 언어의 농간(弄奸)이다. ‘정당한’이란 한마디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이 형용사는 매끄러워서 붙잡을 수 없고 아리송해서 기댈 수 없다. 이 몽롱한 형용사 한 개로 괴물을 막으려 한다면 더 큰 괴물이 달려든다.”
김훈은 희망을 말하면서 상처받은 짐승처럼 포효했다. 그래도 ‘함께 외쳤다’는 그 사실을 희망으로 설정했다. 김훈의 글이다. “이날 현장에서 이 젊은 교사의 ‘희망’은 아직은 울음으로 보였다. 광화문 앞거리의 거대한 울음은 이 시대의 지층 맨 밑바닥까지 울려야 하는 울음이다. 숨진 여교사는 지금 이름도 없고 사진도 없다. 숨진 여교사가 이름 석 자와, 웃는 표정의 사진으로 돌아오기를 교사들은 바라고 있었다.”
김훈은 글 말미에서 함께 있고, 함께 외쳐 해결책을 찾자고 촉구했다. 김훈은 <한국일보>와 <시사저널> <한겨레신문>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장편소설 ‘하얼빈’ ‘칼의 노래’ ‘달 너머로 달리는 말’, 소설집 ‘저만치 혼자서’, 산문집 ‘연필로 쓰기’ 등이 있다.
김동리·황순원·김동인·이상·대산문학상 등을 받았다. 1948년, 서울 생, 그의 아버지 김광주는 상해 임정의 김구 주석 밑에서 일했다. 광복 후 경향신문 문화부장과 부국장을 지낸 소설가다. 김훈은 휘문고 재학 중, 아버지가 암에 걸려 투병하자 연재하던 무협지 원고를 대필도 했다. 1966년 고대 정외과에 입학했다. 2학년 때 바이런 시를 읽고 영문학에 심취해 학업을 중단한다. 2년 뒤 영문과로 옮겼다. 2학년을 마치고 1970년 입대, 1973년 전역했다. 병장 무렵, 부친 별세로 경제적 곤란을 겪었다. 당시 여동생도 고대 영문과에 다니고 있었다. 등록금 낼 형편이 안 될만큼 힘들었다.
여동생에게 “넌 대학을 안 다니면 인간이 못 될 것 같으니”라며 대학을 중퇴했다. 그런 후 1973년, 영어교사 자격증을 따고 임용고시에 전국 2등으로 합격했다. 같은 해 한국일보에 입사, 사회부 기자로 일했다. 1974년 교제하던 이연화와 결혼했다.
한국일보 기자 때, 1986년 5월~1989년 5월까지 박래부와 함께 ‘문학기행-명작의 무대’를 연재했다. 작가와 함께 여행하며 작품의 시대적, 지리적 배경과 역사적 의미를 기록하는 기획이다. 문단과 독자들의 큰 반향을 불러왔다. 나중에 <김훈-박래부의 문학기행>으로 출간된다. 몇 차례 퇴사와 재입사를 반복하다 1989년 12월 31일 마흔둘에 진짜 퇴사했다. 고정된 직장과 수입 없이 한동안 지냈다. 이 즈음 <월간미술> 등에 수필을 연재했다. 한겨레 기자도 잠깐 했다.
참 독특한 인생 역정을 겪은 김훈에게 풍파가 닥쳤다. “가장 중요한 일은 밥을 열심히 성실하게 벌고, 그 안에서 도덕을 실현…” 의외로 ‘밥벌이의 힘’을 그는 강조하곤 했다. 개딸들의 폭언과 인신공격, 모진 이 풍파 또한 지나가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