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욥기’는 해피엔딩인가?

‘욥의 고난’, 세거스 제라드 작


욥기 42장

우리는 상실과 피해를 수량화 하는데 익숙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건물에 화재가 나도 피해규모 00억원, 자연재해를 입어도 피해규모 00억원, 정신적 피해보상 판결도 0천만원 등으로 환원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 돈이 있다고 모든 피해가 원상복구 되는 것은 아닙니다.

수치와 수량으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과 상처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숭례문을 겉보기에 아무리 완벽하게 재건했다 하더라도 절대로 재건할 수 없는 영역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욥기의 결말을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요?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욥 42:12)

결과만 놓고 보면 욥은 잘 풀렸습니다. 이전보다 더 많은 재산이 생겼고 또 다른 자녀들이 생겼습니다. 140년 동안이나 장수하며 자손 4대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욥이 과거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 수 있었을까요? 욥은 자신의 고난이 완벽하게 해소되었다고 느꼈을까요?

먼저 떠나보낸 자식의 얼굴들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마다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도대체 우리 가정에, 내 아이들에게, 내 인생에 왜 그런 일이 생겼던 것일까’ 어쩌면 그는 풀린 듯 풀리지 않은 질문들을 가슴 한 켠에 깊이 묻어 두고 남은 여생을 보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윌리엄 블레이크 작 ‘욥기’ 연작 중 ‘친구들의 비난을 받는 욥’(1825년)

우리는 ‘욥이 인내하고 견뎠더니 모든 것이 회복되었다’ 하고 심플하게 결론을 내리고 싶은데, 그건 다소 성급한 결론이 아닐까 합니다.

욥기의 마지막 장에서 욥이 마주했던 것은 구체적인 해답 풀이가 아니라 불가항력적이고도 거대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욥이 절규 속에서 던졌던 급박한 질문들에 하나님은 하나도 대답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욥에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셨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문제가 풀리기보다 풀리지 않는 문제를 품는 여유가 욥에게 생겼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갈급함이 해답에 대한 조급함을 누그러뜨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삶을 조망하는 또 다른 시야를 제공합니다. 욥은 자신이 겪어야 했던 어마어마한 고통들, 그 의미에 대한 질문을 가슴 한 켠에 묻어둔 채, 삶의 굽이굽이에서 발견되는 퍼즐조각을 차곡차곡 모아 하나님의 큰 그림을 천천히 맞추어 가며 남은 여생을 보내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하나님께서는 답을 주시기보다 답 없는 인생을 견딜 힘을 주십니다. 문제를 풀어주시기보다 문제를 품는 법을 알려주시는 분이십니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