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칼 꺼내기 전에 질문 먼저 꺼내다

“우리가 말씀을 읽으며 기도생활을 하는 이유는 내 생각을 강화시켜줄 근거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기 위함입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매일 기도하는 삶의 축복이란 섣부른 판단을 잠시 유보할 수 있는 넉넉한 여유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여호수아 22장

가나안 땅은 요단강 서쪽입니다. 그런데 요단강 동쪽에 이미 자리를 잡은 지파들이 있었습니다. 르우벤과 갓, 므낫세의 반 지파입니다. 이 세 지파는 다른 지파들이 가나안 땅 정복 전쟁을 치르는 동안 요단강 서쪽으로 넘어와서 함께 싸웠습니다. 그리고 정복전쟁이 끝난 후 다시 자기네 땅으로 돌아갑니다. 이 때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염려 섞인 당부를 합니다. 그 땅에 가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말고 힘을 다해 계명을 지키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모습이 여호수아 22장 초반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요단을 건너 돌아간지 얼마나 되었을까요? 이상한 소문이 들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들은즉 이르기를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의 맨 앞쪽 요단 언덕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쪽에 제단을 쌓았다 하는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이를 듣자 곧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러 가려 하니라”(여호수아 22:11-12)

요단 동쪽 사람들이 우상의 제단을 쌓았다는 뉴스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단 분노부터 하고 봅니다. 순식간에 온 회중이 집결할 정도로 그들의 분노는 맹렬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라 그런지 이해보다는 오해가 빠릅니다. 누군가의 아픔을 쉽게 진단해버리고, 타인의 언행을 내 방식으로 해석하며, 사회적 현상을 읽어내는 자신만의 프레임이 각자에게 있습니다. 문제는 자기 중심성을 정당화해 줄 명분을 신앙 안에서까지 찾는다는 것입니다.

분노하며 실로에 모였던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들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이나 했을까요? 그들은 스스로를 민족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모인 하나님의 거룩한 군대라고 여겼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으며 기도생활을 하는 이유는 내 생각을 강화시켜줄 근거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기 위함입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매일 기도하는 삶의 축복이란 섣부른 판단을 잠시 유보할 수 있는 넉넉한 여유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다행히도 강 동쪽 지파들에 대한 오해가 풀렸습니다. 칼을 꺼내기 전에 질문을 꺼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판단이 이미 섰더라도 잠시 미뤄두고 한 번 더 물어본다고 나쁠 것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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