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탄생’의 참뜻···’충격적인 하향성의 삶’
“기독교는 한번도 제대로 시도되지 않았다” 체스터톤의 주장이다. 예수님을 응시하다가 속에서 끓어오르는 안타까움을 토로한 것으로 들어야 한다. 예수님을 바르게 따른 제자들이 왜 없겠는가? 믿음의 열전을 보면 이름의 목록은 생각보다 훨씬 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끼친 해악에 주목하면 온갖 비난을 들어도 대꾸할 말이 없다. 그러나 이 점은 분명히 해야 한다. 예수님은 기독교를 창시하러 오시지 않았다. 유대교가 독점한 하나님의 실상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참얼굴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로 우리를 이끌고자 오셨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시지 않았다. 오히려 섬기러 오셨고 자신의 생명을 다른 사람들의 대속물, 즉 몸값으로 지불하러 오셨다. 섬김을 받아야 마땅한 분이 섬기러 오셨다는 것은 권리포기의 선언이다. 스스로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은 분이 오셔서 ‘나를 따르라’고 부른 제자들에게 남다른 기득권을 주실 리가 없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각자 십자가를 지고 오라는 제자들에게 십자가 없는 영광을 약속하실 리가 없다. 충격적인 하향성의 삶을 택하신 분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매력적인 상향성의 삶을 보증할 리가 없다.
성탄절은 예수님의 성육신, 말씀이 육신이 되신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다. 하늘의 메시지가 땅의 메신저로 오신 사건의 의미를 되새기는 날이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충격적인 하향성의 삶을 택한 결과 인류 역사가 BC와 AD로 나뉘게 된 뜻을 돌아보는 시간이다. 예수님은 그 흔한 환영 플래카드 하나 붙지 않은 곳에 오셨다. 마리아가 해산할 곳을 찾지 못해 애를 태우는 사이에 인간의 첫 호흡을 하셨다.
예수님이 오신 것을 눈치챈 사람은 종교인들이 아니다. 토라를 목숨처럼 여기며 메시아를 기다리던 정통 유대인들도 아니다. 한밤중에 들에서 양무리를 지키던 목동과 동방에서 온 현자 셋이다. 탄생 축하 메시지와 선물을 가져온 자들은 그들이 전부다. 그러나 메시아 탄생 소식을 전해들은 헤롯 대왕은 권좌를 지키기 위해 아기 예수 탄생 전후로 태어난 아이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다. 예수님은 출생에서 십자가의 죽음까지 그 생명을 노리는 자들 속에서 복음을 전했고, 아픈 사람들을 치유했고, 말씀을 가르쳤다.
예수님의 탄생을 우리는 왜 기뻐하는가?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대신 해주셨기 때문이다. 그 일을 위해 오셨고, 그 일을 다 이루셨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그 일을 계속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메시아만이 하실 수 있는 그 일, 단 한가지 그 일이 곧 구원이다. 그래서 성탄의 절기에 유독 강렬하게 기억하는 그분의 호칭은 구세주, 구원주이시다. 그분은 창조주, 심판주인 동시에 우리 각 사람의 구원주이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날마다 죽어가는 인간에게 주신 선물은 인간이 생각하고 욕망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뜻밖의 선물이다. 인간은 마셔도 마셔도 목마른 물을 찾고,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음식을 찾지만 하나님은 더 이상 목마르지 않고 허기지지 않는 생명을 주신다. 이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다. 이 생명은 영원한 사랑이다. 이 생명은 영원한 빛이다. 이 생명은 길이요 진리요 부활이다. 이 생명으로 땅과 하늘이 연결되었다. 이 생명을 얻는 자는 땅에서 살지만 하늘을 산다.
충격적인 하향성의 선택으로 고난 받고 수치를 겪고 십자가에 벌거벗긴 채 매달려 죽으러 오신 분은 결코 이 세상의 복을 약속하지 않으셨다.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하며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복을 약속하셨다. 긍휼을 베풀고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케 하고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복을 구하라고 하셨다. 그분은 충격적인 상향성의 삶을 추구하라고 성공을 부추기신 적이 없다. 그분은 나를 따라 죽으라고 부르셨을 뿐이다.
그러니 성탄의 뜻을 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게 이기적일 수 있는가?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고 고백하는 제자라면 어떻게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는 선택과 결정이 가능한가? 예수님이 친히 가르쳐주신 기도를 배운 성도라면 어떻게 일용할 양식 외에 탐욕의 더미를 쌓을 수가 있겠는가?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그는 필시 성탄절은 산타클로즈가 내가 그토록 평소에 갖기를 원했던 선물보따리를 갖고 오는 날로 듣고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신앙의 적은 불신이 아니다. 신앙의 적은 오신(誤信)이다. 그릇된 믿음이다. 잘못된 믿음이다. 해로운 믿음이다. 신앙의 적은 또한 위선이다. 이기심의 발톱을 숨기고 탐욕의 얼굴을 가리고 교만의 종교성으로 덧칠한 신앙이다. 사람은 속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속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이는 속지 않으신다. 천사의 말을 하고 세상의 비밀을 알고 가진 것을 모두 기부할지라도 그 중심의 동기에 속는 법이 없으시다. 성탄절은 그런 하나님이 인간으로 친히 오셔야 했던 까닭을 되돌아보는 시간이다.
예수님은 손을 내미는 자에게 예외 없는 선물이다. 스스로 아무 자격 없다고 생각하는 것만이 자격이다. 나로서는 받을 만한 공로가 손톱만큼도 없다고 고백하는 것만이 자격이다. 그래서 구원이고 그래서 복음이고 그래서 은혜다. 에베레스트 등정 루트는 여러 코스다. 그러나 땅에서 하늘로 가는 길은 하늘에서 내려온 자가 아니고서는 하늘로 데려갈 자가 없다. 천하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길 이름은 없다. 예수님의 약속이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 내가 너희를 그리고 데려가마.” 성탄은 이 초대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