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괴짜’ 박상설 ‘영원한 노마드’ 깐돌이 선생님 너무 그립습니다”
[아시아엔=김태형 국립암센터 전 교수, 에모리대 의대 전 교수] “한밤 자정에 시계 소리 산골을 울리고/달은 헐벗고 하늘을 헤매고 있다/길가에 그리고 눈과 달빛 속에/나는 홀로 내 그림자와 걸어간다/시계 소리 산골에서 자정을 울리고/오, 달은 저 하늘에서 차갑게 웃고 있다.”
위의 헤르만 헷세의 시 ‘자정 이후의 한 시간’이 떠오를 때면 깐돌이 박상설 선생님이 생각난다. 선생님도 좋아하시던 시였다. 선생님과 나의 인연은 2003년 여름 가평의 가덕산 오름길에서 시작되었다. 우리 인연은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선생님의 샘골 레저농원에 모여들던 수많은 사람 중 끝까지 선생님 곁에 남아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선생님 속에 내재된 ‘괴짜스런’ 기질에 많은 사람들이 오래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나는 1997년 Emory 의과대학을 정년퇴직하고 서울 아산병원과 일산 국립암센터에서 교수직을 맡게 되었다.
한국에 있는 12년 동안 선생님처럼은 아니지만, 산행을 좋아했고 책 읽기를 좋아했고 또 작물 재배 습성이 몸에 배어있었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에게 끌렸고 시간을 내 샘골 레저농원을 찾으며 선생님의 색다른 생활방식에 넋을 잃곤 했다. 선생님은 나의 별명을 선비, 원님, 고니 등 셋을 놓고 고민하시다가 끝내는 고니라고 부르셨다. 고니의 별명을 얻은 또 한 사람은 수산식품으로 세계적인 기업을 키우고 있는 김수경 SLS 대표다. 일찍부터 문학을 사랑했고 시를 좋아했고 텃밭도 가꾼다. 독서의 양도 엄청난 김수경 대표를 선생님은 고니라고 명명했다. 특히 마라톤까지 좋아해 나와 그는 오누이 아닌 오누이가 되어 서로를 응원한다.
선생님은 내가 마라톤에 푹 빠져있음을 아시고부터는 가끔 괴짜라고도 부르셨다. 결국 사유(思惟)하는 마라토너는 곧 괴짜이고 철학자라는 것이다. 괴짜라면 선생님 같은 괴짜가 대한민국 어디에 또 있을까?
육군 장교 시절 결혼식 날 신랑을 거꾸로 매달고 때리려는 처가의 남자들을 향해 권총을 발사한 일, 오래 전 캘리포니아에서 히피들과 어울려 광란의 시간을 보낸 일, 미국과 중국 그리고 알래스카와 인도를 도보와 기차로 횡단한 일…. 근래에는 학생들과 공무원들을 위해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자연인의 참삶을 보여주자고 호텔 대신 학교 운동장이나 연수원 영내에서 텐트를 치고 밤을 보내시던 일….
각종 나물 무침은 물론 김치를 직접 담그고, 식혜를 만드시며 빨래 설거지를 혼자 하시던 일…. 가족으로 손자 손녀까지 있으면서도 가정생활을 철저히 거부한 일…. 어느 하나 괴짜 아닌 것이 없다.
사회성을 거부하고 상식적인 사회생활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떼 지어 몰려다니지 않고 연어처럼 물을 거슬러 올라가며 자기 자신으로만 산 사람. 무소유에 가깝게 사치스러운 삶을 거부한 사람. 그리고 헤르만 헤세의 정신세계를 사랑하고 윤동주 시인을 흠모했던 문학인. 선생님은 철학, 경서, 동서의 문학작품과 과학서적을 두루 읽으셨다.
공대 출신답게 모든 과학이론에 밝으셨고 샘골을 찾는 젊은이들을 위한 열역학 제2법칙(entropy)에 대한 설명은 일품이었다. 반면, 선생님은 나에게 진화론이나 유전학의 상세한 부분까지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셔서 나를 쩔쩔매게 하셨다.
선생님은 불경도 섭렵하신 듯하다. 어느 해인가 <천수경>을 건네주시며 나보고 꼭 읽어보라고 하셨으니 말이다. 그는 많은 돈을 들여 20만 그루의 방대한 산림을 조성하셨으며, 산길을 걸으며 꽃씨를 뿌려 다음 해 찾아가 만발한 꽃을 반기곤 하셨다. 그리고 선생님은 춘천에, 인천에, 남양주 등에 아파트가 있었지만, 그의 진짜 집은 야생화 핀 산골, 억새 무성한 산등성이에 그때 우연히 텐트를 친 곳이 아니었을까?
나는 선생님이 어떤 종교에 심취했었는지 여쭈어본 적은 없다. 하지만 영국 여행작가 브루스 챗윈의 말에서 힌트를 찾았다. “If you walk hard enough, you probably don’t need any other god.” 걷기의 神(God of walkers)이 선생님의 내부에 들어와 선생님과 하나가 되었을 거라고.
몇 년 전 내가 국립암센터에서 폐암 수술을 받고 중환자실로 막 옮겨져 아직 마취 기운이 남아있을 때였다. 뜻밖에 선생님이 중환자실에 나타나 간호사와 말다툼 하시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내 수술 소식을 듣고 샘골에서 급히 달려오신 모양이다. 중환자실에는 면회가 안된다는 간호사에게 “내가 김 교수의 보호자이니 꼭 들어가 봐야 한다”고 큰소리로 호령을 하고 계셨다. 내가 은퇴하고 미국으로 다시 돌아와 텃밭을 일구며 살 때도 끊임없이 이메일이나 카톡을 주셨다. 선생님의 글은 늘 철학자의 사유가 묻어있었다.
방대한 저술을 남긴 헤밍웨이는 한마디의 새로운 단어를 창조해내지 못했다지만 선생님은 새로운 시어詩語를 줄곧 만들어 내셨다. 선생님의 아름다운 글귀는 구구절절 시詩 자체였다. 선생님에게 수시로 시詩로 응답하며 나도 자연스레 시인으로 등단을 했다. 나는 언젠가 시 ‘맹꽁아’를 지어 주야로 독서하며 자연과 일치된 삶을 살아가시는 선생님에게 보내드렸는데 선생님이 크게 웃으셨다는 소문이다.
전국 방방곡곡 여기 맛집 저기 맛집/이 방송도 먹방 저 방송도 먹방/앞길 건강원에서도 뒷골목 영양탕집에서도/입 터지게 먹어대는 남녀노소/저마다 배를 풍선처럼 불리는구나!//갯벌에 바다에 산에 개울에/수천수만 년 함께 살아온 무수한 생명들/그물, 덫, 올가미, 함정에 채이고/칩장하는 길짐승 날짐승 곤충까지 덮치니/어느 작은 숨이라도 살아남겠나//옛날 당 시인 한유(韓兪)/사람답게 살려거든/뱃속은 시서(詩書)로 채워야 한댔는데/뒤뜰의 맹꽁아/너는 오늘 무엇으로 배 속을 채웠더냐?
뭐니 뭐니해도 선생님은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신 분이다. 산속 텐트 안에서나 시내 전철에서 그리고 멀리 기차 여행 중에도 책을 읽으시고 끝내 책도 출판하셨다. 그의 대표작 <잘 산다는 것에 대하여>는 지금도 많은 이들이 삶의 지침으로 삼는다. 내가 <소아암 알면 완치할 수 있다>를 펴내 2013년에 우수건강도서로 보건복지부 장관상을 받았을 때는 선생님은 나보다 더 기뻐하셨다.
샘골농장에서 수확한 옥수수 한 포대를 둘러매고 암센터로 나를 찾아오시던 선생님, 시청 앞 어디에 7000원짜리 맛있는 보리밥집이 생겼다고 좋아하시던 선생님, 춘천 곳곳의 맛집을 찾아 주시던 선생님, 마라톤의 국민영웅 함기용 선생님과 (박 선생님보다 두 살 아래의 춘천 출신) 춘천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즐겁게 웃으시던 선생님…. 내가 선생님은 마라톤 근처에도 안 가보셨는데 어떻게 마라톤 주자의 정신세계를 그려내는 능력이 그렇게 탁월하시냐고 여쭐 때였다. “옛날엔 달리기를 하면 춘천에서는 내가 제일 빨랐었지!” 하신다. 아마 함기용 선수와는 함께 달리지 않으셨나 보다.
어느 해인가 선생님이 헷세의 <데미안> 독후감을 써야 한다며 미국에 있는 나에게 책을 급히 부쳐달라고 부탁하셨다. 내가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 헷세를 탐독하고 있었을 때였다. 헷세의 대표적 서정시, ‘자정 이후의 한 시간’이 말해 주듯이 선생님은 오늘도 눈 덮인 산길을 달그림자와 더불어 걷고 계실 것 같다. 길가에 그리고 눈과 달빛 속에 선생님만의 고독을 즐기며….
선생님은 여러 해 ‘기부앤기분’의 이창식 이사장님과 함께 숲 문화(살롱)를 통해 자연의 소중함을 알리며 지내셨고 행동하는 인문학 카페 활동을 하시며 후학들을 위하여 한시도 쉬지 않으셨다. 영원한 노마드, 괴짜 괴짜 괴짜 깐돌이 선생님! 이 후학은 오늘도 당신을 그리워합니다.
2022년 5월 9일 ‘고니’, ‘괴짜’ 김태형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