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 제정 소파(잔물) 방정환 “어린이는 어른보다 한 시대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수운회관 내 세계어린이운동발상지 기념비

5월 5일 어린이날을 지은 소파(小波) 방정환은 1899년생으로 서울 야주개(당주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당호인 소파를 한글로 풀어 ‘잔물’이라는 필명으로 동시를 남기기도 했다. 소파는 19세에 천도교 교주이며 독립운동가인 손병희의 사위가 되면서 비로소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그는 24세 때인 1923년 5월 1일 어린이날을 제정한 독립운동가요 아동문학가다.

소파는 부인(손병희의 세째 딸)에게 남긴 글에서 어린이 존중과 사랑을 때로 웅변하듯 때로는 나지막이 설파한다.

“부인, 내 호가 왜 소파인지 아시오? 나는 여태 어린이 가슴에 잔 물결을 일으키는 일을 해왔소. 이 물결은 날이 갈수록 커질 것이오. 훗날에 큰 물결 대파가 되어 출렁일 것이니 부인은 오래오래 살아서 그 물결을 꼭 지켜봐주시오.”

그는 어린이를 어른의 스승으로 여기자고 했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한 시대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어린이의 뜻을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어린이가 하늘이요, 어른은 땅이라고도 했다. “싹을 위로 보내고, 뿌리는 일제히 밑으로 가자.”

소파 방정환과 그가 만든 잡지 <어린이>

소파의 이런 생각을 담은 글귀를 새긴 기념비가 서울 운니동 천도교 본부가 있는 수운회관 앞에 서있다. 세계 어린이 운동의 발상지라는 표현이 눈길을 끈다. 그만큼 그의 어린이 사랑, 어린이 존중은 천도교의 인내천사상에 닿아 깊은 내력을 지닌다.

잔물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 존중, 어린이 사랑의 정신을 되새긴다. 이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은 너무나 소중하고 예쁜 새싹들임을 이 땅의 어른들이 가슴에 새겨야 한다. 어린이가 어른의 참 스승이다.

잔 물결인, 소파인 어린이들이 언젠가 대파로, 큰 물결로 자라나 대한민국을 우뚝 세울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소파 방정환은 어려서 어머니와 누이를 잃고 새 어머니가 들어왔으나 정을 못 붙이고, 그 대신 그림그리기와 글짓기에 재미를 붙였다. 유복한 환경이었지만 9세 때 종조부 사업 실패로 그의 집이 파산을 맞게 되어 견디기 힘든 불행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소학교 학생인 10세 때 ‘소년입지회’라는 모임을 조직하여 토론, 연설의 수련을 쌓아 가기 시작했다. 1914년 선린상업학교에 들어갔지만 2년만에 그만두고 열여섯에 <청춘> 지에 글을 투고했다.

19세에 천도교 교주이며 독립운동가인 손병희의 사위가 되면서 비로소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일본에 건너가 도요(동양)대학 철학과에 다니며 아동 문제를 연구했다. 1921년 서울에서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면서 어린이에게 존대말을 쓰기로 하는 등 본격적인 어린이 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전국을 두루 다니면서 강연을 하는 한편 세계명작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펴냈다.

1923년에는 한국 최초의 어린이잡지인 <어린이>를 창간했다. 그 해 5월 1일 어린이날을 제정해 ‘어린이날’ 운동을 범사회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한편 ‘어린이’라는 단어가 언제부터 쓰였는지 분명치 않지만 기록으로는 방정환 번역시의 장르 소개 명칭으로 처음 소개된 것으로 확인된 바 있다.

그는 각종 대회, 강연회, 강습회를 주관,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기 위해 끊임없이 다양한 형태의 글을 발표했다. 소년 운동이 좌익들에 의해 참뜻이 왜곡되자 1928년부터 일선에서 물러나 오로지 잡지와 동화순례 강연의 길만 걸었다. 당시 그의 동화는 명성이 자자해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일화 중 그의 이야기가 너무도 재미있어 차마 그 자리를 뜨지 못하고 고무신을 벗어 오줌을 눈 어린이도 있었다. 방정환은 19세 때인 1917년 지하단체 ‘청년구락부’를 조직했으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 1일자로 못 나오게 된 <독립신문>을 오일철 등과 함께 등사판으로 찍어 돌렸다. 또한 독립선언문을 돌리다 일경에 잡혀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일제 경찰의 요시찰 인물이 된 그는 일경의 감시를 피해 일본 유학길에 올라 도요대학에서 아동 예술과 아동 문제에 대한 연구를 했다. 23세이던 1921년 여름방학을 이용해 고국에 돌아와 ‘천도교 소년회’를 조직했다.

전국 곳곳을 돌면서 ‘잘 살기 위하여’라는 강연으로 부모들의 계몽에 힘썼다. 이듬해인 1922년 세계명작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펴내면서 “학대받고 짓밟히고 차고 어두운 속에서 다시 우리처럼 자라는 불쌍한 어린이들을 위해 그윽히 동정하고 아끼는 사랑의 첫 선물로 나는 이 책을 짰습니다”라고 머리말에 썼다.

25세가 된 1923년 3월 한국 최초의 본격 아동잡지인 <어린이> 첫 호를 천도교 소년회 이름으로 냈다. 또한 그 해 5월 1일에 소춘 김기전 선생 등 몇 분과 더불어 첫 번째 ‘어린이날’ 기념식을 가졌다. 그리고 같은 해 다시 일본에 간 그는 일본에 있던 우리나라 유학생 동지들과 함께 ‘색동회’라는 어린이 문화운동단체를 만들었다. 그는 그 해 동화대회, <어린이> 창간 기념 가극대회, 소년문제 강연회, 아동예술 강습회 등 수많은 활동을 했다.

1924년에는 소년지도자대회를 개최했고, 1925년에는 어린이날 기념 전단을 뿌렸다. 그러나 1925년에 이르러서는 우리나라 어린이운동도 금이 가서 그가 이끈 소년운동회와 정홍교가 이끄는 ‘오월회’가 따로 어린이날 기념식을 올렸다. 그러다가 1926년 10월 두 단체가 모여 ‘조선소년연합회’로 합쳐 방정환이 첫 위원장이 된다.

이듬해 3월 전국 350여 소년소녀 단체 대표들이 천도교 기념관에 모여 ‘조선소년총동맹’을 만들고 정홍교가 위원장이 되었으며, 방정환은 개벽사에서 <어린이> <신여성> <학생> 등 잡지를 펴내면서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이처럼 어린이 운동에 심열을 기울이던 그는 1931년 서른 세살에 지병인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났다. 초지일관 어린이를 사랑하고 어린이를 위해 애쓰며 건강을 돌보지 않고 열정적으로 짧은 한 생애를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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