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엔 14세기 프랑스 ‘칼레의 시민들’ 몇명이나?

칼레의 시민들

[아시아엔=류재국 문화비평가, 칼럼니스트] 1914년 독일의 극작가 카이저(G. Kaiser)가 발표한 3막 희곡 <칼레의 시민들>은 지도층 시민들의 인도주의적 희생정신에 의하여 영국군 점령 하의 칼레시가 파괴를 면하게 되는 이야기다. 작품 모티브는 1347년 백년전쟁에서 영국을 상대로 저항했던 프랑스의 칼레 시민들의 용기와 사회 지도층에게 요구되는 높은 도덕적 인간애와 헌신에 대한 기대였다. 카이저는 독일 표현주의 연극의 기념비적 작가가 되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의 선택적 헌신

<칼레의 시민들> 1막은 프랑스 북쪽의 12만 항구도시 칼레시가 1년 가까이 영국의 거센 공격을 막아내며 견뎠지만, 보급로가 끊어져 굶어 죽든지 항복하든지 둘 중에 하나의 길을 선택해야 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먹을 것이 없어 버티기 힘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결국 항복을 하게 되고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칼레 시민 모두를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칼레시는 영국 왕에게 항복사절단을 보내어 자비를 구한다. 영국의 왕은 사신을 보내 그동안의 반항에 대한 책임으로 칼레시를 구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한다. 조건은 칼레시를 대표하는 시민 6인이 인질로 나서 모자를 쓰지 않고 맨발로 셔츠만 걸친 채 목을 매 처형받아야 하는 형벌이다. 광장에 모여 소식을 전해 들은 칼레의 시민들은 혼란에 빠진다. 누가 도시를 위해 죽어야 한단 말인가?

<칼레의 시민들> 2막에서는 시민들이 시청 앞에서 모여 도시의 운명에 대해 논쟁을 벌인다. 프랑스군의 대장 뒤게스끌랭은 희생을 치르더라도 폭력에는 폭력으로 항거할 것을 주장한다. 그때 칼레시에서 가장 부자인 외스타슈 드 쌩피에르가 첫번째 희생 인질로 자원한다. 그는 힘들게 건설해 온 도시를 보전하기 위해 폭력적 항거보다는 적은 희생으로 영국 왕의 조건을 수용하자고 했다. 이어서 교수형을 자처하는 시민 6인이 자원한다. 그들은 시장, 법률가, 상인 등 상위권 계급이나 부유한 귀족들이다.

그런데 영국 왕이 요구한 6명보다 1명이 많은 7명이 지원했다. 이 상황에서 쌩피에르를 제외한 나머지는 깊은 갈등과 고민에 빠진다. 살아남을 한 사람을 제비뽑기를 통해 가려내자고 하는데, ‘갈림길의 선택’이라는 모티프가 극적으로 드러나서 마음을 흔들리게 한다. 그들의 마음을 눈치챈 쌩피에르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 있는 나머지 6인이 모두 같은 색의 공을 뽑게 하여 자신들의 희생에 대한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갈림길은 언제나 선택이라는 행위와 그 행위가 가져올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과 두려움으로 마음을 흔들리게 한다. 그래서 제비뽑기는 미뤄지게 되고 다음 날 아침 동이 틀 무렵 시청 앞 광장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6인을 선발하기로 한다.

<칼레의 시민들> 3막에서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 모티프가 서사적 행동으로써 선택의 결과가 제시된다. 약속된 시간에 6인의 시민들이 도착하지만 가장 먼저 도착할 것으로 예상했던 쌩피에르는 끝까지 도착하지 않는다. 분노한 군중들 앞에 쌩피에르의 아버지가 시신을 담은 관과 함께 나타난다. 아들 쌩피에르가 희생의 필연성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지난 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말한다. 이에 칼레시의 시민들은 쌩피에르의 희생 앞에 모두들 숙연해진다.

이제 남은 6인의 지원자들은 점령자의 요구대로 속옷 차림에 목에는 밧줄을 걸고 교수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그들이 출발하여 교수대에서 처형되려던 순간, 영국 왕의 사신이 도착하여 사형을 중지한다. 전날 밤, 영국 왕의 왕비가 자신의 임신 소식과 함께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편지를 영국 왕에게 전한 것이었다. 임신한 왕비의 간청을 들은 영국 왕은 죽음을 자처한 6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어떠한 생명도 죽이지 않을 것이며 칼레시와 칼레 시민들은 안전할 것이라고 전한다. 용기 있는 6인의 행동으로 모든 칼레의 시민들은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2022년 한국사회, 칼레의 6인은?

1347년의 이 이야기는 한 역사가에 의해 기록돼,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전형으로 이어져 왔다. 그로부터 548년이 지난 1895년, 칼레시는 시민 6인의 용기와 헌신을 기리기 위해 프랑스의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에게 조각상을 의뢰한다. 로댕은 6인이 목에 밧줄을 메고 자루 옷을 입고 나오는 순간을 묘사한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칼레의 시민>이다. 로댕은 개인 내면의 도덕적 정화로 도시와 다수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지도층의 인간애를 형상화하였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소유나 존재냐>에서 생명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모든 인간에게 존재하는 의식이지만, 이럴 때 사람들은 죽음 자체를 두려워한다기보다, 소유하고 있는 것을 잃는 것에 두려워한다고 했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에게 뿌리박힌 소유에의 욕망일 것이다. 이 조각상은 소유와 권력을 많이 가진 자들이 헌신하는 죽음 앞에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과 두려운 감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로댕은 애국주의나 영웅주의 대신 사실성 속의 진실을 선택하였고, 추상적인 가치를 강요하기보다는 희생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카이저는 자신의 고향인 막데부르크의 광장에 세워져 있는 로댕의 6인의 조각상으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는다. 그리고 인간애와 희생을 기초로 한 희곡 <칼레의 시민들>(1914)을 완성한다. 카이저가 묘사한 이념은 플라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지혜, 용기, 절제, 정의의 4주덕을 강조했다. 그는 철인통치를 위해서는 철인 왕과 수호자 계급에게 명예만큼 의무를 다해야 하는 강력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요구했다.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의 말을 빌리면 직급이 높은 사람들이 이기심을 버리고 절대다수와의 배려를 우선시하는 도덕심과 헌신을 발휘하는 것이다. 20대 대선을 마치고 6.1지방선거를 앞둔 지금 불공정과 불법, 이기심과 탐욕, 소유와 욕망으로 점철된 한국사회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들에게 우리의 재산과 생명을 맡겨도 좋은가, 저마다 지지해달라고 외치는 그들에게 칼레의 6인을 기대할 수 있는가?

7 comments

  1. 류재국 교수님이 칼럼 잘 읽었습니다.
    칼레시민에 관한 역사적 사실은 예전에 공부한 적이 있어서 친숙한 내용입니다만, 류 교수님의 글을 읽으니 그 의미가 새삼 가까이 다가옵니다.
    노블례스 오블리쥬…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이 가슴속 깊이 새겨야할 마음가짐일 것입니다.

  2. 칼레의 시민들을 통해서 우리나라를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좋은 칼럼 감사합니다!!!

  3. 노블레스 오블리주 ,칼례의 6인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혼란한 정치현실 목소리 높이는 정치인들이 꼭 알고 실천해야하는 귀감이 되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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