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비평] ‘즐거움’으로 위장한 TV예능···“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아시아엔=류재국 세계신화연구소 선임연구원, 문화비평가] 2011년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케이블방송과 종편에서 지상파까지···. 셀 수도 없고, 제목도 모르는 프로그램이 자고나면 하나씩 늘어나 전방위적·무차별적으로 방영된다. 속수무책이다. 방송에서는 이를 ‘TV예능’이라고 한다. 연예인들이 자신의 본업과 상관없이 밥 지어 먹고, 낮잠 자고, 수다 떨고, 남녀가 짝짓기하고, 혼자 살림하는 것들이 ‘즐거움’으로 변장한다. ‘예능’이라는 용어로 우리 곁에 다가와도 하등 생소함을 느끼지 않는다.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
아레테(arete)라는 말이 있다. 아레테란 사람이나 사물에 갖추어져 있는 도덕적 미덕을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로, 참된 목적이나 개인의 잠재된 가능성 실현에 관계된 탁월한 성질을 가리킨다. 즉 운동선수는 경기에서 뛰어난 기량을 다하는 것으로, 정치인은 정치를 바르게 하는 것으로, 음악가는 최고의 기예와 예술성을 가지고 연주하는 것이다.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에서도 아레테가 나온다. 그것은 최상의 무기를 소유하여 훌륭하게 싸울 수 있는 능력과 영웅적인 성품을 소유하는 것을 일컫는다. 아레테는 단순히 예술적 탁월함 즉 재능의 탁월함만 상징하는 게 아니라 인격의 탁월함을 함께 의미한다.
예능의 아레테를 살펴보자. 예능이란 예술에 대한 기예를 이르는 분야를 통틀어 이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창작술>에서 예술은 그것의 최고개념에서, 예능을 인간의 궁극적인 삶을 구성하는 정신의 진지한 활동 중 하나로 규명한다. 그것의 목적은 즐거움이지만, 이성적인 향유 상태에서 완전한 휴식과 완전한 에너지의 결합을 아레테의 완성이라고 보았다.
즐거움에 대하여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지나친 쾌락이나 즐거움은 영혼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질병들로 경고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윤리학>에서 어떤 즐거움은 인간의 활동을 완성시키는 것으로 ‘최고선’(탁월성을 갖춘 즐거움)이지만, 어떤 즐거움은 인간의 악덕과 관련하여 ‘나쁜 것’으로 규정한다. 이 둘 모두 좋은 행동과 좋은 생각을 즐거움의 참된 기준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처럼 고대의 호메로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예능과 즐거움의 아레테에 대한 참된 기준을 인격의 탁월함, 좋은 행동과 좋은 생각, 그리고 정신의 진지한 활동으로 권장하고 있다. 이러한 권장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의 TV예능은 비정상적인 것이 정상적인 것을 앞지르고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TV예능을 보고 웃음을 자아내는 것은 그 자체의 소재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일반적이어야 하는 그 행동이 정상적인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현재의 TV예능은 △혼자 살기 △혼자 밥 먹기 △엉뚱한 행동하기 △연애 밝히기 △문제아 되기 △먹방 대결하기 △저능아 흉내 내기, 그리고 이것도 모자라서 최근에는 감방생활 체험 프로그램도 방영한다. 예능인은 음식을 무자비하게 먹어대고, 온종일 떠드는 수다로 여러 방송에 겹치기 출연 기록과 개인별로 참여하는 프로그램 숫자로 교만을 떨기도 한다. 언제까지 아레테를 상실한 이들의 저급한 움직임을 예능으로 혼용하고 보아야 하는 것인가?
예능과 즐거움은 서로 길항하면서 조우하고, 공존하면서 반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산과 결혼을 장려하는 ‘노총각 탈출’ 프로그램을 만들었더니 오히려 자유롭고, 엉뚱하고, 재미있는 생활상을 보여줌으로써 싱글을 고수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 물론 개성이 존중되는 사회로 지향하는 차원이라지만 시청률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TV예능의 절제나 윤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의 심각성은 도를 한참 넘어서고 있다.
예능인의 경계와 구분이 없어진 지도 오래다. 자기 분야에서 최상의 아레테를 가진 스포츠선수, 연기자, 아나운서, 가수, 개그맨, 요리사, 정치인까지 ‘기-승-전-예능’에 귀착하여 ‘예능인이 되고픔’에 몸을 던진다. 이들은 5천만 시청자를 대상으로 2% 부족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더 이상 그들은 영웅도 아니며, 청소년들이 꿈 꾸던 대상도 아니다. 인기 있던 명성과 자신의 사생활을 담보로 인기와 시청률을 유도한다. 그것도 모자라 갓 태어난 어린 자녀, 배우자, 형제, 부모까지 동원하여 ‘리얼예능’을 포식한다. 아레테를 포기한 것이다.
오늘날 예능방송은 영혼을 저당잡힌 비대해진 육체와 같다. 시청자들은 이들을 통해 처음에는 재미있게 보지만 차츰 권태를 느끼고 채널을 돌린다. 그래 봐야 새 채널도 같은 사람이 모자란 듯한 행동을 팔면서 웃음을 구걸하고 있다. 동시간대 모든 채널이 리얼예능에 점령당하여 우리의 정신과 사유는 눈 둘 곳이 없다. ‘가벼운 것’에 푸욱 길들여진 것이다. 안방을 점령한 이들 방송의 일탈행위는 ‘예능’의 지고성과 순수성을 욕되게 함으로써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떠오르게 한다.
필자는 TV예능 방송도 전파를 이용하는 이상 공공성과 사회규범을 확보해야 한다고 본다. 오늘의 예능방송이 좋은 의미에서 한국사회가 글로벌화와 다변화에 기여한다고 하지만, 나쁜 의미에서는 개인을 상실케 하여 집단적으로 길들이는 기능을 하고 있다. TV예능 프로그램의 대대적인 변화와 축소 그리고 ‘예능’이라는 용어 사용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