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군상(群像)들의 광장···한트케 ‘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
[아시아엔=류재국 세계신화연구소 선임연구원, 문화비평가] 페터 한트케(Peter Handke)의 <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임의의 광장에서 서로 비껴가면서 거니는 사람들 모습을 묘사한다. 다양한 군상들의 모습은 무의식적이고, 무관심으로 지나가는 일상의 광장으로 보여준다. 각자의 길을 가는 그들은 말을 하지 않으며, 비언어극, 탈언어극 혹은 무언극의 형태로 그냥 지나친다.
2월 20~24일 연극 극단 ‘무천’ 제작으로?서강대 메리홀 무대에 오른 <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재구성, 연출 김아라, 번역 김원익)은 그 흔한 얼개나 스토리도 없다. 행동언어, 소리언어는 있되 문자언어인 대사는 없고, 음향효과와 조명의 역할이 배가 되는 비언어총체극이다. 연극에서 문자언어는 매우 중요한 도구이며, 배우의 가장 강력한 표현의 권력이자 자유의지다. 그럼에 불구하고 <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은 이런 문자언어의 의지를 괄호 안의 언어인 무대지문으로 대체하고 있다.
광장은 침묵하지만, 말을 하고 있는 것
일반적으로 ‘광장’은 개방된 장소로서 사람들이 한데 모이고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장소를 말한다. 최인훈의『광장』을 빌어보면, 집단이 갖고 있는 폐쇄성을 고발하는 동시에 사회적 불균형과 방일한 개인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이는 이념이 바탕에 깔려 일정한 규칙에 지배되는 사회성을 폭로한다. 이에 반해 한트케의 광장은 이념이 없다. 이 작품의 번역자 김원익은 한트케의 광장을 “수많은 사람들이 만나 북새통을 이루었던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Agora)”로 규정한다. 그것은 광장의 모습을 통한 우리 삶의 총체라고 말한다.
광장에서의 하루를 연출했던 김아라는 수많은 군상을 바라보는 노숙자를 ‘날개 달린 천사’로 규정한다. 그 천사는 광장 길 한가운데에서 무관심하고, 무의식적으로 비껴가는 사람들을 향해 마음속으로 호통 치는 역할을 한다. 마치 초능력자 유리 겔라가 상대방 마음을 움직이듯이 말이다. 연출자는 주인공 노숙자를 날개를 감춘 천사로 설정한다. 노숙자는 광장의 벤치에서 자고, 일어나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며 새벽부터 가로등이 켜지는 밤까지 군상들의 하루를 스캔한다.
이 작품은 마치 하루 동안 일어나는 사건의 결말을 짓는 고전주의극의 3일치 법칙을 연상시키며 노숙자의 빛나는 눈을 통해 군상들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작품은 시작과 끝이 열린 구조 속에서 이루어진다. 주인공 노숙자의 관찰은 광장에서 사람들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행위들을 눈으로 촬영한 동영상 같은 작품이다. 그의 눈은 관객의 눈이며, 우리들의 눈이다. 작품에서 사람들이 말없이 서로 스쳐 지나가기도 하고, 습관적인 행동을 하며 바쁘게 골목으로 사라진다. 모두가 제각기 카메라처럼 모습과 인물을 바꿔가며 일종의 공연을 한다. 군중은 광장 속에 거주하면서 그 자신이 배회한 광장에 지나치고, 자신의 광장 속에 거주하는 존재다.
그들의 하루의 광장을 나타내는 공연의 구체적인 장면은 새벽의 광장, 오전, 오전과 정오 사이, 정오, 오후 4시, 저녁, 밤, 다시 새벽을 알리는 시간이다. 이 시간들 속에서 과거와 현재의 인물들이 다가오고, 비껴지나가며, 다시금 머물다가 그 자리를 떠난다. 모두가 떠난 광장에는 찌꺼기만 남는다. 찌꺼기는 청소부가 나타나 쓰레기를 치움으로서 끝이 나고, 다시 광장의 새벽은 시작된다. 그것은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한다는 꿈의 퍼포먼스다.
광장은 이념이 아니라 꿈을 꾸는 소통의 공간이다. 그것은 소외, 고독, 무관심, 폭력, 저주, 이념, 저항, 화해, 용서를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광장은 침묵하지만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수용미학적 관점에서 연극의 주인은 관객
<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은 ‘듣는 연극’이 아니라 ‘보는 연극’이다. 19명의 배우가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450명의 군상을 연기한다. 그들은 3천년 전부터 현재의 군상까지 다양하다. 그런데 뚫어지게 보지 않으면 많은 인물들을 놓친다. 순간순간 이 인물들을 놓치는 게 아깝다. 그들은 각자 고유의 행동들을 통하여 지나가기도 하고 때론 머무르곤 한다. 오랫동안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게 된다. 그것들은 과거의 기억이나 꿈속에서 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 현실로 돌아와 눈앞에서 펼칠 때 메시지를 읽어야 한다.
초기 연극의 가장 중요한 원형적 요소는 보는 예술이다. 이후 연극이 현실을 재현하는 환영극으로 발전하면서 보는 것보다 듣는 것이 중시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연극은 문학의 텍스트에 종속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보는 연극’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내세우는 이 작품은 연극의 원형성을 강조한 실험적 형태의 광장언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연극에서 아무런 대화 없이 어떻게 소통이 가능한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한트케는 이 작품에서 더 이상 연극이 작가의 언로가 아니라고 판단한다. 연극은 관객이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기회라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또한 연극은 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감성적으로 수용할 것을 요구한다. 말의 연극, 수다의 연극시대에 침묵의 연극을 시도한 이 작품은 광장의 평범한 충격을 전해준다.
보통 언어를 통해 한정된 의미를 전달하는 전통적 대사극에 비해 관객이 수용하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의미를 생산하는 탈언어극의 쇼킹함은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한트케는 도발적인 연극이 사회를 효과적으로 환기시킬 수 있는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연극의 주인은 더 이상 작가나 연출, 연기자의 것이 아니라 관객의 것이라는 한트케의 관점은 연극을 통해 어떠한 메시지도 주지 않는다. 그것은 관객의 몫이다. 관객이 중심이 되는 수용미학적 관점의 연극은, 연극이 스스로 비판적 기능을 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다. 그리고 이성이 아닌 감성을 수용의 도구로 제시한 것은 포스트모던 이후 연극의 흐름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연극관을 가장 효과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한트케는 대사를 완전히 제거한 ‘침국하는 연극’을 제시한다. 연극이 입을 닫았다고 관객이 입을 다문 것은 아니다. 바로 이 점이 한트케의 도발성이다. 전통적인 언어극은 무대의 말로 관객의 입을 다물게 하지만, 말이 사라진 <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은 다양한 우리의 이야기를 관객 스스로 말하도록 자극한다.
이 작품의 연출가 김아라는 “침묵보다 강력한 언어는 없다”고 말한다. 이들의 침묵하는 무대는 이 시대의 고독과 무관심을 대변하는 군상들의 광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