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식구는 어떻게 다른가?
가족과 식구란 말은 어떻게 다른가? 가족은 부부를 중심으로 하여 그로부터 생겨난 아들, 딸, 손자, 손녀 등 가까운 혈육들로 이루어지는 집단을 말한다. 반면 식구는 같은 집에서 살며 끼니를 함께 하는 사람이다.
필자는 8살까지 지금은 비무장지대라 갈 수 없는 고향 경기도 장단면 서장리 창골마을에서 자랐다. 할아버지 할머니, 큰 어머니 고모까지 대식구였다. 식사 때마다 할아버지와 필자가 겸상을 하고, 나머지 식구들은 큰상에서 따로 드셨다.
하도 배가 고픈 시절이라 얼른 밥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빈 밥그릇을 숟갈로 득득 긁고 있으면 얼른 할아버지가 당신의 진지를 큰 술로 떠서 내 밥그릇에 덜어 주신다. 그럴 때마다 옆에서 고모님이 어김없이 군밤을 주었다. 그리운 가족이 지금은 다 떠났지만, 애틋한 정과 그리움이 사무친다.
그런데 ‘식구’란 개념이 우리를 따뜻하게 감싸야 할 터인데, 오늘날 진정 옛날과 같은 가족애를 느끼며 살아가는 ‘식구’란 게 있기나 한지 알 수가 없다. 이렇게 가슴을 따뜻하게 적시는 우리의 단어 ‘식구’가 그립고, 그 시절이 그리워지지 않는가?
가족은 영어로 ‘패밀리(family)’다. 노예를 포함해서 한 집안에서 생활하는 모든 구성원을 의미하는 라틴어 파밀리아(familia)에서 왔다. 즉 ‘익숙한 사이’라는 의미다. 중국은 ‘일가(一家)’, 일본은 ‘가족(家族)’이란 용어를 주로 사용한다. 즉 한 지붕 밑에 모여 사는 무리라는 의미다.
반면, 우리나라는 ‘식구(食口)’라는 말을 주로 사용해 왔다. ‘같이 밥 먹는 입’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한국인에게는 ‘가족’이란 ‘한솥밥을 먹는 식사 공동체’라는 의미다. 그래서 남에게 자기 아내나 자식을 소개할 때도 ‘우리 식구’란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렇게 볼 때, 한 집에 살아도 한 상(床)에서 밥을 먹지 않거나, 식사를 할 기회가 없다면 엄밀히 말해서, ‘핏줄’이기는 해도 ‘식구’랄 수는 없다. 최근 한국 가정의 위기가 심각해지고 있는 것은, 가족 간에 식사를 같이 하지 않는 풍조가 늘고 있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다.
몇 년 전 뉴스에 나온 고된 이민생활 속에서도 6남매를 모두 예일대와 하버드대에 보내 미국 최고 엘리트로 키운 전혜성 여사도, 자녀교육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아침식사는 가족이 함께 했다”며 ‘밥상머리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요즘 우리 생활을 들여다보면, 실제로 ‘식구’가 얼굴 맞대고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밥상머리뿐인데, 지금 우리나라 가정에서는 온 식구가 한 밥상에서 같이 식사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1970년대만 해도, 대부분의 가정에서 늦게 귀가하는 ‘식구’를 위해, 아랫목이나 장롱의 이불 속에 밥을 묻어 두곤 했다. 밥의 온도는 곧 ‘사랑의 온도’였다. 자식이 아무리 늦게 들어와도 어머니는 뜨끈한 국과 따뜻한 밥을 챙겨 주셨다.
그런데 요즈음엔 밤늦게 들어와 아내에게 밥상 차리라고 했다간 이 시간까지 밥도 못 먹고 어딜 돌아다녔느냐고 핀잔 듣기 십상이고, 부엌에 라면 있으니 끓여 먹으라고 한다.
누가 말했던가? 오늘날 아버지는 ‘울고 싶어도 울 곳이 없는 사람’이라고. 오늘날, 대부분의 아버지는 직업 형편상 귀가하는 시간이 대체로 늦다. 그래서 식구들이 가장을 기다리다가 먼저 잠자는 경우가 많다. 어쩌다 아이들이 깨어 있어도 컴퓨터나 휴대전화에 정신이 팔려 제방에서 건성으로 인사만 건넨다.
그러니 밥상머리 교육이나 대화는 기대하기 힘들고 나아가 얼굴은 자주 못 봐도 서로 각자의 시간과 생활은 간섭이나 침범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찬바람 불 듯, 집안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든다. 평소 눈길 한번 준 일 없던, 애완견만이 한밤중에 반갑게 맞아주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품안의 자식 대하듯 애완견 재롱에 푹 빠진 가장을 보면, 뭐라 말할 수 없는 쓸쓸함이 밀려온다. 한 집에 살지만, 잠만 집에서 자는 동거인에 불과해진 오늘날 한국가족의 현실이 서글플 따름이다.
고 정진석 천주교 추기경은 평소 “가정은 신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마련된 성소(聖所)이니 물질의 노예, 정보의 노예가 되지 말고, 가정 안에서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했다. 이렇게 생각을 정리해 보면, 가족과 가정의 해체는 결국 ‘식구’의 소멸과 가정의 부재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식구’란 정겨운 단어가 그립고, 어릴 적 식구들과 빙 둘러 앉아 함께했던 밥상이 정말 그립다. 필자 역시 천지사방 돌아다니다가 이제 늙고 병들어 삼시 세끼 아내와 단둘이 식사를 하는 것이 여간 서글퍼지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