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의 대선 길목 D-76] 득표율 99.9% 대통령, 반세기 전 대한민국에서…
투표율 100% 득표율 99.9%. 이런 선거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실제로 우리나라 대통령선거에서 나온 기록입니다. 1972년 오늘 실시된 제8대 대통령 선거결과입니다. 장충체육관에서 헌정사상 첫 번째 치러진 체육관선거에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359명은 단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출석해 박정희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출했습니다.
홀로 입후보 등록을 한 박정희 후보에 대한 반대표는 단 한 표도 없었고, 무효표만 2표가 나왔습니다. 1년 전 치러진 제7대 대통령선거(1971.4.27)에서 득표율 53.2%(634만표)로 당선됐던 박정희 대통령이 불과 1년 여 사이에 99.9%의 득표율로 당선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대통령 선출에 시민과 정당을 따돌림시켰기 때문입니다.
유신헌법은 대통령을 시민이 직접 선출하는 직접선거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뽑는 간접 선거로 바꿨습니다. 간접선거마저도 귀찮았는지 대통령 임기도 종전의 4년에서 6년으로 늘렸고, 대통령 연임 문제는 아예 규정도 없었습니다. 대통령 후보 입후보도 정당추천이 아니라 통대 추천을 받아 등록하도록 하였습니다.
제9대 대통령선거도 제8대와 같은 방식으로 치러져 역시 홀로 입후보한 박정희 후보가 당선되었습니다. 1978년 7월 6일 장충체육관에서 치러진 선거에는 대의원 2,581명 가운데 2,578명이 출석해 2,577명이 박정희 후보에 표를 던졌습니다. 득표율은 99.9%. 당시 투표는 후보의 이름을 적는 방식이었는데 무효표는 ‘박정의’라고 쓴 표였습니다.
야당은 후보를 내지 않았습니다. 김영삼 의원 등 신민당 비당권파가 후보를 내야 한다며 대통령후보 선출 전당대회 개최를 요구했지만 이철승 대표 등 당권파가 반대해 좌절되었습니다. 반대 논리는 어차피 통대 200명의 추천을 받을 가능성도 낮고, 등록하더라도 필패이므로 간접 선거를 보이콧하고 직선제 개헌 투쟁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제7대와 제8대 대통령선거를 합쳐 출석을 안 한 기권이 3표, 사실상 반대표인 무효표 3표입니다. 유신체제가 무너진 뒤 치러진 제11대 국회의원 총선(1981.3.25)에 통대 출신들이 여럿 출마했습니다. 통대 출신 후보들에게 독재의 하수인이라는 비판이 높았는데, 무효표를 던진 게 바로 자신이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무기명 투표이니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박정의’라고 쓴 무효표는 단순한 실수일까요, 아님 의도적 실수일까요. 이 무효표는 경북 지역에서 나왔는데, 독재에 순응할 수는 없으나 드러내놓고 반대할 수 없는 분위기라 ‘박정의’라고 써서 무효로 만들었다고 밝힌 이가 있습니다. 진실은 오직 당사자만이 알 것입니다.
체육관선거를 만든 박정희 대통령 사후에도 체육관선거는 세 번 더 치러졌습니다. 제10대 대통령선거(1979.12.6)에서는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당선되었습니다. 득표율 96.3%에 무효표는 82표였습니다. 민주공화당은 김종필 총재 출마를 검토했으나 통일주체국민회의 선출을 반대하는 의견과 군부의 견제로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최규하 대통령이 군부의 압력에 못이겨 8달 만에 사임한 뒤 치러진 제11대 대통령선거(1980.8.27)에서는 전두환이 당선되었습니다. 득표율 99.4%에 무효표는 단 한 표였습니다. 개정된 5공 헌법에서도 대통령간선은 유지되었습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를 대통령 선거인단으로. 이름을 쓰는 대신 인쇄된 명부에 도장을 찍는 것으로 바꾸었을 뿐입니다.
제12대 대통령선거(1981.2.25)에서 전두환은 90.1%의 득표율로 당선되었습니다. 3명의 후보가 더 입후보해 민주적인 선거처럼 꾸며놓았지만 이들은 들러리였을 뿐입니다. 이때는 대통령임기가 7년 단임이라 전두환은 제11대 제12대 두 번에 걸쳐 8년을 재임했습니다. 결과적으로 4년 중임을 한 것과 같았습니다. 앞으로 다시 체육관선거를 치르는 일은 없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