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일동 명창의 렌즈 판소리] 저 눈발에 날리는 문장들···작가 ‘김훈’의 경우

겨울 나무

“내 끝나지 않는 운명에 대한 전율로 나는 몸을 떨었다. 나는 다시 충청 전라 경상의 삼도수군통제사였다. 그리고 나는 다시 전라 좌수사였다. 나는 통제할 수군이 없는 수군 통제사였다. 내가 임금을 용서하거나 임금을 긍정할 수 있을는지는 나 자신에게도 불분명했다. 그러나 나의 武는 임금이 손댈 수 없는 곳에 건설되어야 마땅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 건설은 소멸되기 위한 건설이어야 마땅할 것이었다.” (김훈 <칼의 노래> 중에서)

□ 치욕과 생존 사이에서 뒤채며

남자는 늘 사회적 선택을 강요당한다. 어느 진영이냐, 어디 소속이냐, 어느 편이냐···. 선택을 한 다음 책임을 져야하고 밥값을 해야 한다. 경쟁은 치열하다. 적자생존, 자기 영역을 지켜내야 생존이 유지되는 맹수의 세계와 다름없다. 가족의 밥그릇을 유지해야 한다. 그 어깨에 드리워진 밥벌이는 지겹다 못해 무섭기도 하다.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에 이르기까지 작가 김훈은 거창한 명분과 이데올로기에 집착하지 않는다. ‘무력한 살아있음의 비애’를 자인하면서 끼니를 때워야하는 생물학적 진실에 진저리친다. 죽음에서 가깝고 욕망에 부대껴야 하는 존재. 가까스로 살아있어 가까스로 아름다운 생존. 한 평론가는 이를 ‘불가피의 미학’이라 부른다.

김훈은 전쟁이 드리운 공간을 탐닉한다. 악과 폭력이 횡행하는 약육강식의 터전. 세상의 됨됨이가 압축 발현되는 상징적 질곡이다. 전쟁의 소용돌이에 갇힌 이순신(칼의 노래), 우륵(현의 노래), 서날쇠(남한산성)의 삶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동일시된다. 무력한 리더십을 한탄하고 제 생의 남은 날을 도모해야 하는 절체절명은 우리의 자화상이다.

작가는 치욕을 건드리면서 자존을 두드린다. 생의 자존과 치욕은 한 몸이 되어 비장하게 펼쳐진다. 국가가 나를 지켜주지도 않고 조직이 나를 감싸주지도 않는다는 것을 자각한다. 세상은 가일층 만인대만인 투쟁 상황이다. 시대라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살아남아야 하는 개별자의 손짓 발짓 몸짓의 총합이다.

우리는 대부분 무산자다. 노동력과 급여로 삶을 유지한다. 마음의 여유를 포기하는 대신 조직의 작동논리를 받아들인다. 몇 푼의 용돈으로 겨우 영화 몇 편을 보고 자기계발서 몇 권을 읽는다. 김훈은 그런 한국 남자의 공허한 마음을 읽었다. 치욕과 자존이 버무려진 비애를 비루한 역사의 공간에다 형상화시킨 것이다. 한국 남자는 김훈의 글로 인해 괴로워하면서 위로받는다.

“문장으로 발신(發身)한 대신들의 말은 기름진 뱀과 같았고, 흐린 날의 산맥과 같았다. 말로써 말을 건드리면 말은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빠르게 꿈틀거리며 새로운 대열을 갖추었고, 똬리 틈새로 대가리를 치켜들어 혀를 내밀었다. 혀들은 맹렬한 불꽃으로 편전의 밤을 밝혔다. 묘당(廟堂)에 쌓인 말들은 대가리와 꼬리를 엇물면서 떼뱀으로 뒤엉켰고, 보이지 않는 산맥으로 치솟아 시야를 가로막고 출렁거렸다. 말들의 산맥너머는 겨울이었는데, 임금의 시야는 그 겨울 들판에 닿을 수 없었다.” (<남한산성> 중에서>)

□ 한 줄의 문장을 구하기 위하여

김훈에게 문장 스타일은 겉멋이 아니다. 그의 내용이자 형식이다. 그의 본질이자 앵글이다. 그의 서사는 장황하지 않고 압축적으로 전개된다. 너절하지 않고 진지하여 읽기가 쉽지 않다. 주인공이 애써 중얼거리지 않는다. 백일몽으로 들뜨고 신파로 찔끔거리지 않는다. “21세기적 상상력이다”라며 가볍게 찰랑대지도 않는다.

세상 풍경은 시선에 포개지고 흉중의 비장미로 가라앉는다. 형용사와 부사를 부리지 않고 주어와 술어로만 승부하려는 문체주의자. 역사를 가로지르는 직감적 묘사가 앞서고 시공을 꿰뚫는 유장한 시선이 독백처럼 뒤따른다. 인간의 개별성과 구체성이 뒤채는 동사(動詞)에 실려 여울진다. 그의 문장을 따라 걷다 보면 세상의 길 위엔 선 ‘수많은 나’를 만날 수가 있다.

김훈의 소설 문체는 현미경 같은 사실주의와 칼날 같은 취재의 정밀성에서 비롯된다. 튼실한 팩트는 상황을 추상화시키는 문체 미학의 바탕을 이룬다. 여기에 문장 리듬이 남성적 호흡을 타면서 긴장과 이완을 되풀이한다. 파도처럼 다가왔다 노을처럼 퍼지고 철새 떼처럼 아스라해진다. 문장과 문장은 역설적 관계로 대구를 이루면서 의미를 증폭시킨다.

구체성과 묘사와 주관이 꼬리를 물면서 민감하게 꿰어져 있다. 예민한 후각을 장착한 필력은 팽팽한 관능의 문장으로 날이 선다. 현란한 동사(動詞)의 역동성 사이를 헤매다 보면 마치 몽상에 빠진 듯 얼얼하기도 하다. 바로 문체주의자가 풀어내는 문체의 흡인력이다. 작가가 집중한 몇몇 문맥들은 웬만한 시인의 시적 긴장감을 뛰어넘는다.

김훈은 말한다. “글을 쓸 때 문장 안에 음악이 있어야 합니다. 음악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글을 쓸 수가 없어요. 논리와 사변이 확보된다 하더라도 음악성이 확보되어야 합니다. 전에 에세이를 쓸 때는 진양조 문장을 썼어요. 한없이 뻗어가는 스물네 박자짜리 진양조 문장을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그때는 문장 하나하나가 하나의 우주이고 하나의 세계여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칼의 노래>를 쓸 때는 진양조를 버리고 휘모리로 갔습니다. 짧은 문장으로 마구 휘몰고 나간 겁니다. <현의 노래>를 쓸 때는 중모리나 중중모리로 밀었습니다. 체력이 덜 들어가고 문장이 편안합니다. 그런 박자를 갖는 문장이 아름답고 단정할 수가 있죠.” (계간지 <문학동네> 작가와의 대담 중에서)

“나라들이 언저리를 마주 댄 강가나 들판에서 쇠에 날을 세운 병장기들이 날마다 부딪쳤다. 창이 들어올 때 방패가 나아갔고 방패 위로 철퇴가 날아들었고 철퇴를 든 자의 뒤통수로 쇠도끼가 덤벼들었고 쇠도끼를 든 자의 등에 화살이 박혔다. 쇳조각으로 엮은 갑옷이 화살을 막았는데, 화살촉은 날마다 단단해졌고 갑옷은 날마다 두꺼워졌다. 경작지는 좁고 곡식이 모자랐으므로 포로와 투항자와 부녀자들은 모두 들판에서 베어졌고, 가축들은 살아서 끌려갔다.” (<현의 노래> 중에서)

惡은 끊이지 않는다. 인류사의 거듭된 약육강식. 그치지도 지치지도 않는 약육강식. 김훈은 앞으로도 그것을 쓰겠다는 거다. 惡의 총체성이 드러나는 과정이 약육강식이라고 파악한다. 惡을 직시할 때 非惡 反惡이 드러난다. 약육강식은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살아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아름답기 위해서 우선 살아남아야 한다. 동시에 살아남는 것은 굴욕이고 치욕이다. 치욕을 담담히 담아내는 것. 작가는 그것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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