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양희 시인 “사람 때문에 하루는 살 만하고 사람 때문에 하루는 막막합니다”

천양희 시인이 이동순 시인에게

[아시아엔=이동순 시인, 영남대 명예교수] 혼자 산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혼자 잠자리에서 눈을 뜨고 혼자 살아있음을 발가락 꼼지락거려 확인하고 혼자 헛기침을 해서 주변의 고독을 밀어내고 혼자 주방에서 뭔가를 끓여 끼니를 잇고 혼자 누워서 읽던 책을 마저 읽고 혼자 작은 방에 서성이며 긴 하루해를 보내고 혼자 컴컴한 방에 불을 켜고 혼자 책상에 앉아 자정이 넘도록 시를 쓰고 혼자 양치질 하고 혼자 잠자리에 드는 이런 독신의 생활을 평생토록 해온 시인이 있다.

천양희(1942~ ) 시인이 바로 그분이다. 나는 그녀를 잘 알지 못한다. 문단행사에서 한두 번 만난 적이 있지만 살뜰한 대화를 나누지도 못했다. 왠지 어둡고 침울해 보이는 얼굴표정에 가슴이 저려서 그 사연을 궁금히 여긴 적이 있다.

한 유명시인의 아내로 살다가 그와 헤어진 뒤로 줄곧 혼자 살며 시를 써왔다. 그의 시는 감성적이고 진솔하며 자기 앞의 운명에 대결하는 자세로 평가된다. 방향 없는 막막한 세계에서의 길 찾기, 인간과 삶, 자연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담아내는 그런 작업에 대체로 성공을 거두는 시인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한 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고독과 고통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과정이다. 그 원인과 배경에는 사랑과 이별이 있다. 그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을 아프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하고 감격하게 하고 잠시나마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삶의 원천적 질료가 아닌가?

시인 천양희는 시 ‘사람의 일’에서 그러한 시적 통찰을 그림처럼 보여주고 일기처럼 담담히 고백한다.

고독 때문에 뼈아프게 살더라도
사랑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고통 때문에 속 아프게 살더라도
이별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이 사람을 다칩니다.
사람과 헤어지면 우린 늘 허기지고
사람과 만나면 우린 또 허기집니다.
언제까지 우린 사람의 일과
싸워야 하는 것일까요.
사람 때문에 하루는 살 만하고
사람 때문에 하루는 막막합니다.
하루를 사는 일이 사람의 일이라서
우린 또 사람을 기다립니다.
사람과 만나는 일 그것 또한
사람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천양희, ‘사람의 일’ 전문

여러 해 전 내가 어느 문학상 심사를 보았을 때
최종으로 오른 후보 중 나는 천양희 시인을 밀었다.
다른 후보와 접전으로 팽팽한 대결이 생겼을 때
내가 중간에서 캐스팅보드가 되어
천양희 시인에게 표를 던져 최종 낙점이 되었다.
문학상이란 것은 시작품도 훌륭해야겠지만
삶에 물질적 고통을 겪는 시인에게
그 혜택이 먼저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당시 천양희 시인은 서울의 어느 임대아파트에서
기초생활이 어려운 생보자로 산다는 얘기를 들었다.
말하자면 생계가 어려운 영세민의 힘든 삶을
시인이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듣고 몹시 가슴이 아팠었다.
그래서 그날 끝까지 내 주장을 관철했던 것이다.
수상자가 언론에 공식적으로 발표되기 전,
나는 시인에게 전화를 걸어 그 소식을 전했다.
그때 감격으로 떨리던 시인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살아간다는 것의 보람은 바로 이런 일이 아닌가?
힘든 시간 살아가던 시인이
나 때문에 기쁨과 감격을 누릴 수 있으니
나는 그날 즐거운 소식을 전하는 집배원이었다.
두고 두고 흐뭇하며 유쾌한 추억이었다.
내가 시집 <가시연꽃>을 발간해서 보냈을 때
그걸 받고 짧지만 깊은 울림이 있는
붓으로 쓴 다음과 같은 글귀를 보내주셨다.

시정신 놓치지 않고
늘 정진하시는 모습
생생합니다.
좋은 시, 환한 생(生)
기원합니다.

1999. 12. 22

천 양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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