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골 없는데, 높은 산 어찌 이르리요”

대만 화롄 타이루거 협곡의 깎아지를 듯한 절벽, 바라보기만 해도 아찔하다.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곡신불사(谷神不死)는 노자 <도덕경> 제6장에 나온다.

“谷神不死 是謂玄牝. 玄牝之門 是謂天地根.綿綿若存 用之不勤” 뜻인즉 “곡신(谷神)은 죽지 않으니 이를 일컬어 현묘한 암컷이라 한다. 현묘한 암컷의 문을 일컬어 천지의 뿌리라 한다. 면면히 이어져 항상 존재하는 것이니 아무리 써도 힘겹지 않다”고 한다.

‘곡신’은 도(道)의 또 다른 표현이다. ‘계곡의 신’이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계곡은 항상 산과 함께 있다. 곡(谷)이 없이 산(山)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골짜기는 감춰져 있어 산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산의 뿌리가 골짜기란 말이다. 이 순서가 뒤바뀌면 뒤죽박죽이 된다.

언제나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뿌리가 되는 곡(谷)은 비어 있다. 비어 있기 때문에 산에서 흐르는 물을 받아드릴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계곡은 비어있음, 즉 공(空)이다. 그런데 이 계곡의 신(谷神)이 있다. 계곡의 신은 비어 있으며 움직이는 것이다. 단지 비어 있음이 아닌 비어 있음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것을 억지로 이름 붙여 노자는 ‘현빈’(玄牝)이라 했다.

빈(牝)은 암컷으로 음(陰)이며 골짜기다. 현(玄)은 그윽하다, 신비하다는 뜻으로 신(神)의 속성이기도 하다.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것이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

봉우리는 양(陽)이요 골짜기는 마르지 않는 샘, 음(陰)이다. 남자의 심벌보다 여자의 그것이 직접적인 생성의 모체이기 때문에 ‘암컷’이 천지의 뿌리라는 것이다.

도의 본체가 허무(虛無)인 것처럼 골짜기가 비어 있기 때문에 암컷이 일체의 만물을 낳을 수 있고, 자연의 도는 무궁하게 이어진다는 것이 노자의 말씀이다. 노자는 도(道)를 신비한 ‘암컷’에 비유하고 여성적인 것을 자주 언급했다. 때로는 물을 인용해 ‘부드럽고 유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며 도의 작용을 상찬했다.

이 <도덕경> 6장에서 노자가 곡신(谷神)이란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도가 가지고 있는 신비로운 여성성을 드러내 주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그런 여성성이 드나드는 문은 천지의 뿌리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계곡은 받아들이기만 하지 않는다. 받아드린 만큼 내놓는다.

계곡은 결코 받아들인 것을 움켜쥐려 하지 않는다. 거울과 같아서 사물이 다가오든 사라지든 개의치 않는다. 그러니까 ‘현빈지문’(玄牝之門)은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생산하는 것이다. 그렇다. 만물을 받아들이니까 내놓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계곡은 가뭄이 들어 세상이 모두 타들어 가도 마르지 않는다.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낮은 곳으로 임하는 계곡의 정신이야말로 가장 강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경쟁력의 원천이다. 노자는 부드럽고 겸손한 것이 강하고, 교만한 것보다 경쟁력이 있다고 강조했다.

노자가 꿈꾸었던 위대함은 근엄하고, 군림하고, 강압적인 존재가 아니라 부드럽고, 낮추고, 따뜻한 계곡의 정신이었다. 요즘은 센 것이 오래 가고 경쟁력 있을 것이란 생각이 팽배하고 있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부드러움과 낮춤의 계곡정신이 어떤 시절보다 돋보이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우뚝 선 산의 모습도 아름답지만, 자기를 낮추고 있는 계곡의 아름다움도 결코 이에 못지않다. 예수님은 수많은 제자 가운데 12명을 특별히 사도(使徒)로 삼았다. 그리고 사도들에게 명령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복음 20장26절) “높은 사람이 되려면 낮은 사람이 돼라”는 게 예수님의 명령이며, 예수님 자신이 낮은 데로 임하셔서 낮은 사람이 되셨다.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 흘러가는 열린 마음으로 모두를 섬긴다면, 이 사회에 갈등이 해소될 뿐 아니라 누구나 천국을 차지할 것이 아닐까? 높은 사람이 되려면 먼저 낮은 사람이 되라는 예수님의 명령이 바로 필자의 모교인 배재학당(培材學堂)의 교훈 즉 “욕위대자 당위인역”(欲爲大者 當爲人役)이다.

원불교의 성가(聖歌) ‘수덕가’(水德歌)도 이같은 뜻을 품고 있다.

물은 세상 만물을 기르면서도
스스로 낮은 곳에 흘러가나니
섬기는 물의 덕 우리의 정신
겸손하온 물의 덕 우리의 정신

물은 본래 그 성질 부드러워도
구슬 져 방울방울 돌도 뚫나니
꾸준한 물의 덕 우리의 정성
끊임없는 물의 덕 우리의 정성

물은 맑고 흐림을 두루 합하여
맑히며 여울지어 바다 이루니
합치는 물의 덕 우리의 단결
국한 없는 물의 덕 우리의 단결

원불교 성가의 노랫말이 꼭 ‘곡신불사’의 정신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낮은 데로 임하는 사람이 성자이며 부처다. 높은 산에 빠져 깊은 계곡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는 만추가 되었으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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