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과 9.28서울 수복

해병대 병사들이 1950년 9월 28일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있다. 서울을 수복한 것이었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은 전혀 예상치 못한 기습이 아니었다. 김일성은 박훈일을 수도방어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몇 개 여단을 모았지만 부산 공략이 눈앞에 있다고 생각한 김일성은 전선 병력을 뺄 수 없었다, 손을 쓸래야 쓸 수 없게 된 것이다. 맥아더는 이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김일성은 9월 23일 전선의 총퇴각을 명령했다. 건제를 유지한 채 퇴각한 것은 이건무의 4사단, 방호산의 6사단 등 2개 사단뿐이었다. 나머지는 문자 그대로 궤란(潰亂)되어, 분대, 소대 단위로 도주했다.

낙동강 방벽에서 올라온 8군과 인천에 상륙한 10군단은 9월 26일 오산에서 합류했다. 9월 27일 미 합참은 맥아더 장군에 몇 가지 제한을 달아 북진계획을 승인하는 훈령을 하달하였다. 이 훈령에 입각하여 맥아더는 작전명령 2호를 하달하였는데, 요지는 세 가지였다.

첫째 8군은 주력으로 38선을 돌파, 개성-사리원-평양 축선으로 공격하고, 둘째 10군단은 조공으로 주공이 공격을 개시하면 1주일 이내에 원산에 상륙하여 교두보를 확보하고, 원산-평양 축선을 따라 진출하여 8군과 연결, 적의 퇴로를 차단 및 포위하며, 셋째 유엔군이 정주-군우리-영원-함흥-흥남을 잇는 선까지 진격하면 그 이북지역 작전은 한국군이 전담한다.

인민군은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한 후 남진을 계속하여 서울에 남아 있던 부대는 별로 없었다. 북한은 최광을 중심으로 저항해 왔으나 곧 무너졌다. 그 중 연희고지 전투는 치열했다. 해병대 피해가 컸다. 당시 1개 연대 규모의 해병대에서 1개 중대가 몰살당했다.

연희고지 전투는 연세대 북방의 해병대 전승비가 증언한다. 해병대의 불국의 전투 혼은 1951년 5월 도솔산 전투에서 발휘되었다. 9월 28일 해병대는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여 서울 수복을 완료하였다. 수도를 되찾은 공을 외국군에 넘기지 않고 우리 힘으로 되찾은 것을 상징했다.

6월 28일 이후 적 치하에 있었던 서울 시민이 당한 고통은 팔봉 김기진이 증언한다. 인민재판에서 사형을 받은 그는 총살이 아니라 몽둥이로 죽을 정도로 맞았지만 용케 살아남았다. 소설가인 그는 이 체험을 생생히 증언한다.

증오에 불타는 대중의 인민재판과 사람을 때려죽이는 잔악무도는 공산당의 실체를 폭로한다. 6.25전쟁의 참상을 잘 보여준다.

9월 29일 맥아더 원수는 서울 환도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에 서울을 돌려주었다. 북진하던 국군은 10월 19일 평양 출신 백선엽의 1사단은 미국 기병 1사단을 제치고 평양을 선두 점령하였다. 유엔군은 김일성 집무실을 압수하여 중요문서를 노획하여 미국으로 보냈다. 이 가운데는 총정치국장 박헌영에 평양을 포기하지 말라는 절대 비밀로 분류된 명령도 있었다.

노획문서는 학자들이 연구하여 많은 것을 알아내었는데 지금 복사된 일부가 군사연구실에 보관되어 있다.

10월 30일 이승만 대통령은 평양입성환영대회에 참석했다. 언제 이 영광과 환희가 다시 올 것인가? 전쟁을 통해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바라지 않지만, 이때 빛나는 국군의 진격은 기억해야 하며,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의 은공도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9.28을 서울 수복을 맞아 가슴에 벅찬 깊은 감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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