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6.25 공간, 남북한·해외 공동연구 통해 객관성 확보를

이정식 박사

이정식 박사 <한국공산주의운동사> 탁월한 저작

1950년 가을 김일성이 강계로 도주할 때 미군이 집무실에서 획득한 문서를 노획문서라 하는데 미국의 워싱턴 문서보관소에 저장되어 있다. 1982년 방문했을 때 Shipping advice, 즉 아직 짐짝으로 놓여 있었다. 아무도 분류작업을 하지 못했다.

박사논문을 쓰기 위해서는 원사료(raw material) 연구가 필수적이다, 필자는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로 된 문서는 가치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그래서 빨리 훑어 봤다. 중요한 것은 복사를 했다. 1980년대라 기기器機는 오늘 같이 발전되어 있지 않아 30분만 사용할 수 있었다. 그것도 연속이 아니고 30분 지나면 교대해야 했다. 그래서 일주일을 머물렀다. 오하이오에서 애팔래치아산맥을 넘으며 미국의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중요한 사료는 박헌영 총정치국장에게 내린 지령이다. 북한군은 이때까지 정치위원 제도가 도입되지 않았다. 김일, 안길 등 군사위원은 지휘관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박헌영의 임명은 북한의 군부통제가 강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연안파가 많은 군단장 및 사단장에 대한 김일성의 감시의 눈이 강화되었다 심지어 1969년 김일성의 직계인 민보상, 김창봉이 유일사상 문란으로 숙청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김일성에 관한 자료다. 그가 동북항일연군에 참가하였음이 확실해진다. 그러나 동생 김영주에 대해서 좋지 않은 평가인데 일본군 통역을 하였다고 적혀 있다. 군정 당시 소련군 방첩대(SMERSH)가 작성하였기 때문이다. 내무성 정치보위국장은 북한에서 제일 무서운 자리로 알려졌는데 그는 소련 내무성 요원이었다.

관심을 끄는 것은 김일성대학 교원 신상명세서다. 독일 베를린대학 등 명문대에서 공부한 사람이 적지 않다, 당시 국내에서 건국사업에 필요할 때에 적지 않은 인재가 월북했음을 알 수 있다. 김일성대학은 특히 이공계에서 많은 인재를 모았다.

한국전쟁에 주로 의존하는 사료는 주로 미국의 외교문서(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FRUS)다. 국내 정치학자들은 주로 여기에 근거를 찾았다. 북한은 6.25 공간사를 비교적 일찍 1960년대에 발간했다. 국내에서는 국정원에 보관되어 있을지 모르나 일반인은 구하기 힘들었는데 유학한 영국에서는 구할 수 있었다.

1990년대 소련의 기밀 문서고가 열렸다.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이 김일성에 한반도 적화를 지령했음이 밝혀졌다. 여기에 기반을 두지 않은 모든 추론과 학설이 근거가 없어졌다.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가 쓸 데 없는 짓이었음이 밝혀졌다. 김일성의 연설은 하나하나 스티코프가 써준 것이었다. 스티코프는 사실 북한 총독이었다. 소련 해체 후 옐친이 한국에 넘긴 문서에서 원사료가 공개되었다. 스티코프의 가족도 행적을 낱낱이 증언했다.

이정식 스칼라피노 공저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정치학자는 역사학자가 밝힌 사실(fact)에 입각해야 한다. 미국 내 한국 정치학자들은 역사학자이자 정치학자를 겸했다. 최근 별세한 이정식 박사는 북한에서 넘어왔고 한문과 일본어에 능숙해서 주로 원사료에 의존했다. 이정식 박사의 <한국공산주의운동사>는 드문 명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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