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선전영화 ‘1953 금성 대전투’에 어떻게 대응할까?

1953 금성 대전투

한국전쟁이 해를 넘기고 석달쯤 지나던 1952년 9월 접어들어 중공군은 공세를 재개하였다. 중공군은 어떠한 인명 손실도 감수하겠다는 인해전술로 파상공세를 계속해왔다. 혈투는 10월 15일까지 계속되었으나 육군 9사단은 백마고지를 사수하였다. 중공군은 1만여 사상자를 내고 9사단도 3천5백의 사상자를 내었다.

백마고지를 열두 차례나 뺏고 뺏기는 혈전에서 9사단은 5만 5천발 이상의 적 포탄세례를 받았으나 미9군단 포병은 38만발 이상을 퍼부어 9사단을 지원하였다. 백마고지 전투의 승리는 김종오 사단장의 적절한 예비대 투입과 교체 및 적절한 미군 지원이 결정적이었다.

1953년 봄 중공군은 전선에서 전초고지를 목표로 대대나 연대 규모의 제한공세를 가해왔다. 국군은 이들 고지를 사수하려고 하였으나 테일러 8군사령관은 이들 고지가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확보할 필요가 있는가에 의구심을 가지며 고수를 고집하지 않았다. 밴 플리트가 기회만 주어지면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려 하였던데 비해, 테일러는 인명손실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공격보다는 방어에 치중하였던 까닭이다.

1953년 4월 26일 휴전회담이 재개되었다. 쟁점은 군사분계선 획정이었다. 양측은 휴전이 성립되면 접촉선이 군사분계선이 될 것이므로 유리한 지역을 확보해두려고 하여 마지막 공방전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중부에서는 철원-평강-금화를 잇는 ‘철의 삼각지대’ 전투가 대표적이었다. 오성산은 김일성이 ‘장교 군번 한 트럭과도 바꾸지 않는다’는 요충이었다.

그해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2만7천 반공포로를 석방하였다. 흥분한 모택동은 “휴전협정 체결을 미루고 한국군 1만을 섬멸하라”고 명령하였다. 7월 10일 중공군은 15개 사단으로 금성천 북방에서 국군 2군단을 공격하였다. 국군 방어선이 절단되고 대혼란이 야기되자 8군사령관은 금성천 남으로 후퇴를 명령하였다. 7월 공세에서 중공군은 2만8천의 사상자를 냈고 국군도 1만4천의 사상자를 냈다.

일부 언론에서는 금성전투를 당(唐)과 고구려의 안시성 싸움처럼 먼 옛날 일로 금성전투를 소개한다. 그러나 한중관계는 바로 오늘 전개되고 있다. 박근혜 시대 한중관계 개선에 앞장섰든 전문가들은 반성해야 한다. 오늘날 대중무역의 성격, 득실도 더 깊숙이 분석해야 한다. 6.25전쟁은 소련의 지령에 의한 북한 남침으로 시작했지만 중공군 개입 후 미국과 중공, 유엔군의 미니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다. 최근 영국 항모전단의 한국 연해 진입은 당시를 회상케 한다.

이런 가운데 재향군인회가 8일 중국이 만든 선전영화 <1953 금성 대전투>(원제 금강천) 상영 논란과 관련해 한미동맹 약화를 우려하며 상영 허가를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재향군인회는 이날 성명에서 “6·25전쟁의 공범인 중국 공산당이 만든 선전영화를 피해 당사국이 국내 상영을 용인하는 것은 목숨 바쳐 나라를 지킨 호국영령은 물론 6·25전쟁에 참전했던 국군과 유엔군을 능멸하는 것이며 한미동맹을 약화시키는 것”이라고 밝혔다.

재향군인회는 “중국 공산당이 막대한 예산을 들여 이 영화를 제작한 의도는 그들이 6·25전쟁을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시진핑이 지난해 항미원조 70주년 기념식에서 연설했듯이 ‘미국에 맞서 북한을 지원한 전쟁’으로 본질을 왜곡하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재향군인회는 그러면서 “자유민주 체제에서 선택과 판단은 각자의 자유라고 하지만 청소년들에게 침략전쟁에 가담한 중공군을 영웅으로 묘사한 정치 선전물을 보여주는 것은 자유민주 체제의 가치를 뒤흔드는 반국가적 행위”라고 말했다.

시진핑의 종신집권을 위해 인민을 결속시키려고 항미를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금성전투를 재조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도 금성전투, 백마고지 전투 등에서 국군 용전을 기리는 작품을 만들기 바란다. 북한강이 중공군으로 시산혈해(屍山血河)를 이루었던 용문산 전투, 사창리 전투도 더 조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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