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협정 68주년 기념일은 지나갔지만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휴전협정 조인식. 왼쪽 책상에 앉은 사람이 유엔군 수석대표 윌리엄 해리슨 중장이고 오른쪽 앉은 사람이 공산군 수석대표 남일 대장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7월 27일 휴전협정 기념일이었다. 요즘에는 유엔군 참전을 기념하는 날로 시들하다. 그러나 북한은 이날을 6.25전쟁 전승기념일로 대대적으로 경축한다. 완전히 틀렸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 38선은 서부에서 연천의 초성리를 지나갔다. 중부전선에서 높이 그어졌다. 설악산도 휴전 이후 확보한 것이다. 전과로 볼 때 6.25전쟁은 북한의 패전이었다.

남한은 이즈음 휴전반대 일색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6월 18일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유엔군사령관 지휘 하에 전쟁을 하고 미국에 모든 것을 의지고 있는 나라가 2년 넘게 추진해온 휴전협상을 일거에 휴지로 만드는 반공포로 석방을 단행한 것은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영국의 처칠 수상이 면도를 하다가 놀래서 살을 베었다고 한다.

휴전선은 연천에서 매초성 인근을 지나가는데 여기에서 675년 신라와 당이 자웅을 겨루는 전투를 벌였다.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이 많지만, 한반도에서 당唐을 몰아낸 승리에 주목하는 사람이 적은 것은 유감이다.

매초성 싸움은 규모와 전술에서 한니발의 카르타고와 로마가 싸운 ‘칸네 회전’에 비유할 수 있다. 당의 이근행李謹行의 말갈 기병은 당시로서 신무기인 석궁石弓에 완패하였다. 신라는 군마 3만380마리를 얻었으며 얻은 병기도 이에 상당하였다고 <삼국사기>에 나와 있다. 그 후 신라가 당의 세계질서 속에 번영하였기에 이 전승을 고구려의 살수대첩과 같이 크게 평가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당시 당은 오늘날 미국과 같은 세계제국이었다. 당이 신라에 패전한 것은 세계사의 흐름을 바꿨다. 신라는 오늘날의 티베트인 토번土蕃과 대응하여 당을 압박하였다. 당에서는 토번의 요구로 공주를 보냈다. 마치 고려가 원元의 요구로 처녀를 보낸 것과 같다.

신라가 당을 한반도에서 구축한 것은 1453년 오스만터키가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킨 것과 비유할 수 있다.

중국은 국가의 명운을 건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에 승리하였다고 한다. 미국 해병대는 장진호전투에 살아남은 해병대를 장진호의 일본어 발언인 ‘Chosin Few’로 선전한다. 역으로 중국이 세계 최강의 미국 해병대 1개 사단을 전멸 직전에까지 몰아넣었다. 따라서 6.25전쟁은 하나의 제한전쟁(limited war)이 아니라 중국과 유엔군이 온 힘을 기울인 미니 세계대전이었다.

1953년 6월 18일 반공포로 석방에 격앙한 모택동은 한국군 일만명을 살해하라고 명령했다. 1953년 7월 휴전협정 조인 직전에 중공군을 몰아낸 한국군은 675년 매초산성에서 당군唐軍을 격파한 것과 같은 위대한 전과를 거둔 것이다. 6.25전쟁 시말을 정확하게 기록함에 있어서 이것은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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