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체투지 유래와 원불교의 ‘신정의례’

오체투지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불교의 예법에 ‘오체투지(五體投地)’라는 것이 있다. 두 무릎과 두 팔, 머리를 땅에 대고 절하는 예법의 하나로 무한히 자신을 낮추는 행위다.

오체투지는 불보(佛寶), 법보(法寶), 승보(僧寶)의 삼보(三寶)에 불교 신자가 올리는 큰절을 이르는데, 이는 중생이 빠지기 쉬운 교만을 떨쳐내고 어리석음을 참회하는 예법으로 여긴다.

오체투지 예법은 고대 인도에서 공경하는 상대의 발을 받드는 접족례(接足禮)에서 왔다고 한다. 히말라야 산록의 티베트 사람들은 요즘도 몇 달에 걸쳐 오체투지를 하며 마음속의 성지인 ‘라사’(拉薩)로 가는 것을 평생소원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세 걸음을 걷고 한번 절하는 삼보일배(三步一拜) 수행법과 비슷하다.

오체투지라고도 하는 이 말이 처음 등장한 곳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다. 당(唐)나라 승려 현장(玄奘)이 서역에서 불경을 구한 행적을 구술하여 제자 변기(辯機)가 기록했다는 견문록에서 비롯됐다. <서유기>(西遊記)에서 손오공(孫悟空)을 손바닥으로 다루는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대사가 모델이다.

여기에서 서역 사람들이 공경을 나타내는 의식에 처음 공손한 말부터 머리를 숙이고 손을 들며, 읍을 하고 합장한 뒤, 무릎을 굽혀 엎드리고 마지막으로 오체투지를 한다고 했다. 또 한 가지는 가장 오래된 경전의 하나인 <아함경>(阿含經)에도 등장한다. 부처님의 육성이 살아 있는 초기 경전으로 수행방법을 제시한다는 이 경에서 “두 팔꿈치와 두 무릎, 그리고 이마를 땅에 대는 것을 오체투지라 한다”(二肘二膝頂名輪也 亦云五體投地)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통상 행해지는 오체투지 수행은, 인도에서 하던 배와 가슴까지 닿지는 않고 무릎과 팔꿈치를 대지만 공경의 표현은 다름이 없다. 불교의 수행법이던 오체투지가 일반에도 널리 알려진 계기는 2003년 새만금간척지 사업 때 환경훼손과 생명 파괴를 막기 위해 천주교와 원불교 등 종교계 합동으로 수행한 행사에서 찾을 수 있다.

참회하고 고통을 이겨내는 성스런 종교행사가 요즘엔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압박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이 잦다. 과연 이 시대에 실행하기도 어려운 이 오체투지 같은 예법으로 꼭 수행을 하여야만 깨달음을 달성할 수 있을까, 한번 생각해 본다.

원불교 소태산(少太山) 부처님은 1926년(원기11) 허례를 폐지하고 예의 근본정신을 드러내고자 ‘신정의례’(新定儀禮)를 제정했다. 그 후, 2대 종법사 정산(鼎山) 종사는 1935년 <예전>을 새로 편찬했다. ‘예도의 본체, 예절과 처세, 예전에 대한 해설’ 등에 관한 법문 등을 수록하고 신정예법의 정신과 그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정산 종사는 “예의 근본정신은 공경이요, 그 요지는 널리 공경하고 공(公)을 존숭하자는 데에 있다”고 했다.

원불교는 개화기와 일제강압기에 우리 민족이 당면한 역사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조용한 가운데 개혁적 자세를 견지하면서 발전했다.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통해서 종교계 친일세력을 육성·보호·이용하는 것과 동시에 종교계 세력을 분할 통치하여 결집된 힘으로 성장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종교정책의 변화를 시도했다.

특히 1920년대는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됨에 따라 강압적인 통치에 한계를 느낀 일제는 문화정치를 내세워 회유를 통한 민족분열정책으로 선회했다. 그러한 가운데 시대사조는 급격히 변화하고 있었다. 종교·사회·문화적 환경 또한 변모하고 있었다.

따라서 종교·사회·문화적 환경을 주도할 본질로서 예의 변화가 요청되었다. 앞서 소태산 부처님은 1917년(원기2) 8월 제자들과 함께 ‘저축조합’을 창설했다. 그리고 제자들로 하여금 술과 담배를 끊고, 의복과 음식 등을 절약하여 생긴 금액을 저축하게 했다.

이러한 일련의 시도는 소태산 부처님 종교적인 지도력에 바탕하여, 근검절약과 허례 타파를 실천하는 구체적인 모습이었다. 당시 예법이 너무나 번거로워 사람들 생활에 많은 구속을 주고, 경제방면에도 공연한 낭비가 되어 사회발전에 장애가 되고 있음을 본 것이다.

신정의례는 생활에 도움을 얻을 뿐 아니라, 절약된 금액으로 공익사업을 하라고 권장했다. 당시 조선은 ‘주자가례’(朱子家禮)로 예법이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번거롭고 까다로웠다. 그리고 불교는 오체투지 같이 실행하기 어려운 예법을 고집하여 국민들이 미신풍속에 깊이 빠져 있었다.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다. 원불교에서는 오체투지를 폐하고 그냥 큰절로 시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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