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연구의 두 얼굴···”교훈과 자강” vs “분노와 비난”
[아시아엔=안상윤 전 SBS 국장, 베이징특파원 역임] 분노와 증오는 그런 경향성의 반대편에서 생성된다. 흔히들 우리 사회에서 빚어지는 갈등 원인을 이념 대립에서 찾지만, 필자는 존중과 배려의 결핍이 야기한 결과라고 본다. 진영은 그 결과를 자기 입맛대로 소비한다. 정권이 바뀌어도 ‘웃픈’ 블랙코미디가 넘쳐나는 배경이다.
일본은 객관이 ‘공기’처럼 사회를 지배한다. 누구도 그 ‘공기’를 호흡하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 편의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주관을 유보하는 탓에 유동성이 부족하고 피동적이라는 느낌을 주지만 사회는 큰 갈등 없이 규범에 따라 흐르고 움직인다. “매뉴얼만 따르면 손해 보지 않는다”는 믿음이 굳건하다. 한마디로 신뢰지수가 높은 사회인 것이다.
우리는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으로도 신뢰지수가 낮다. 교통사고와 안전사고 발생율이 높은 현실이 이를 입증한다. 역사에 대한 자세도 대비된다. 일본이 역사에서 교훈을 찾고 털고 일어서는 데 비해 우리는 역사에 집착해 거기에 매몰된다.
일본이 두 왜란의 상황을 정리한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을 면밀히 분석해 자국 정치에 접목하며 훗날 조선 침략에 응용한 반면, 우리는 선조와 인조 때 난을 당해 산하가 깨지고 백성이 피를 흘리고 1910년에는 급기야 나라를 빼앗기는 치욕을 당했지만, 그 원인을 분석해 훗날의 교훈으로 삼기보다는 ‘네 탓’만 하며 한풀이에 집착해 온 것이 그 예다.
‘징비’(懲毖)는 “스스로를 미리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는 <시경>의 ‘여기징이비후환’(予其懲而毖後患)에서 따왔다. 그러나 이 취지는 류성룡 시대를 넘기지도 못한 채 잊혔다. 간행 수가 적었고 독자도 한정적이었으며 무엇보다 적폐청산의 진영윤리와 코드 윤리가 19세기까지 지배한 탓이 컸다. 방책 강구보다는 책임 추궁에 더 열중한 것이다.
이 책은 써진 지 92년째인 1695년 교토에서 출간됨으로써 일본에서 먼저 대중화됐다. 한쪽은 맞았으면서도 잊었고, 다른 쪽은 때렸으면서 더욱 기억하려 했다. 역사의 교훈을 망각하면서 임진년과 정유년에 걸친 왜란은 병자년 호란 때도 재연됐다. 국방과 안보에 소홀했으면서 백성들의 피폐한 삶을 걱정해 화친을 주장한 주화파들은 오랫동안 불충의 반열에 이름을 올리는 모순을 보였다. 국방을 소홀히 하고 국제정세에 어두웠던 탓에 나라가 부서지도록 방치한 정부의 실정과 무능은 제대로 짚지 않았다.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민족의 성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부각한 것도 일본 해군이었다. 일본은 적장이었지만, 3백여 척의 자국 전함을 겨우 13척의 배로 이겨낸 충무공의 전략과 리더십을 높이 평가하며 그의 전사를 기록하고 보존했다. 조국에서는 구국의 영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채 오랫동안 잊힌 인물이었다. 평가는커녕 충무공의 임금이던 선조는 그를 질투해 전공 서열도 낮추는 등 평가절하했다. 이런 자세로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수가 없음이 자명하다.
한쪽은 배우고 강해지기 위해 역사를 들여다보고, 다른 쪽은 분노하고 비난하기 위해 역사를 들먹인다. 한쪽이 플러스의 정치를 이어가고 다른 쪽은 마이너스의 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근본 원인이다.
일본도 정권의 우경화 경향과 국민의 활기 부족 탓에 갈수록 정체현상을 보이고 있지만,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얕잡아 볼 나라가 아니라는 점이다. 일본은 갈등을 해소하며 협력해나가야 할 이웃이지, 계산 없이 배척하거나 국내 정치용으로 이용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