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 바라보는 이웃나라 일본, ‘친한’인가 ‘혐한’인가
[아시아엔=안상윤 전 SBS 국장, 베이징특파원 역임] 2015년 3월 15일 일요일, 일본 도쿄의 도쿄돔은 한국 아이돌 그룹 ‘샤이니’(SHINee) 공연을 보기 위해 운집한 10만 관중들 함성으로 뒤덮였다. 이 뉴스는 아베 정부의 역사 인식 왜곡이 야기한 한일간 갈등이 고조되던 상황에 발생한 것이어서 이채로웠다. 한국 언론은 일본의 ‘혐한’(嫌韓)분위기를 한류가 잠재웠다고 해석했다.
필자는 고개를 저었다. 한류도 작용했겠지만, 그보다는 일본 시민이 다양성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는 해석이 더 타당할 듯싶었다. 일본 내에 ‘혐한’을 부르짖는 세력이 분명히 존재하고 그 목소리가 작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또한 한국을 좋아하고 한류를 즐기는 시민 역시 존재하며 그 수가 적지 않은 까닭에 이런 해프닝이 가능한 것이다.
일본인들에게는 마치 ‘공기’처럼 어떤 분위기가 에워싸고 있어 모두가 그것을 부지불식간에 따르는 오랜 습관이 있지만, ‘혐한’은 그 정도로 ‘공기’화 되도록 일본인이 허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다. 너는 ‘혐한’해라 나는 ‘애한’(愛韓)할 테니, 이런 사고를 양보하지 않는 소치다.
비단 샤이니 경우뿐 아니라 다른 한류스타 공연이나 드라마 방송에서도 보인 바 있다. 2013년 8월 일본의 대표적 우익방송 TBS가 SBS에서 방송했던 조인성과 송혜교 주연의 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를 방송했던 것도 좋은 사례다.
국가주의가 강요하는 간섭이나 개입을 거부하고 개인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풍토를 일본인은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자유의지가 자율과 자치, 상호신뢰를 키우며 국가의 성장동력으로 작용한다.
2019년 한국대법원이 일제징용자들에 대한 배상 판결을 내리자 한일 양국은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 빠졌다. 일본은 전임 정부와의 청구권협정으로 일단락됐다고 보는 과거사 문제를 다시 법으로 해결하려는 한국의 조치를 이해하지 못했다. 일본은 즉각 ‘반도체 부품 수출규제’로 보복에 나섰다. 반도체는 한국의 대표적 먹거리 산업이어서 부품 공급이 차단되자 한국사회는 자중지란에 빠졌다.
청와대에서 조국 수석이 1894년 동학혁명 때처럼 “죽창으로 일본에 맞서자”고 선동하고 나섰고, 문재인 대통령은 ‘12척의 배’ 운운하며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겠다”는 말로 전의를 다졌다. 권력 상층부가 이렇게 분위기를 잡자 반일전선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들은 ‘매국노’ ‘친일파’로 매도당했다.
“왜 12척의 배만 남도록 방치했느냐”, “의병이 죽창을 든다고 나라가 구해졌느냐?”, “지금이라도 화해의 접점을 찾으라!”는 의견은 허용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이들을 누군가가 ‘토착왜구’라고 비난하자 너도나도 따라하기 시작했다.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은 모두 ‘토착왜구’라며 매도했다.
이 시기 일본의 유명 일러스트 작가 요시토모(奈良美智)가 한국에서의 지적재산권 승소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의 법은 정의롭다”, “한국은 좋은 나라다”라고 우호적으로 말해 한국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한일관계가 경직된 상태에서 나온 그의 발언은 일본 입장에서는 반감을 살만 했지만, 일본은 별 반응이 없었다. 그의 발언은 전체 기류와 다르더라도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허용하는 일본 사회의 성숙함이 드러난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