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바레인 기자의 삼성 단상···”이건희 회장의 혁신가정신에 매혹됐다”
작년 한국기자협회 초청 WJC 참가, 수원 삼성디지털시티 방문
[아시아엔=하비브 토우미 <바레인뉴스에이전시> 선임기자, <아시아엔> 영문판 편집장] 필자는 2019년 3월 한국기자협회(JAK) 초청을 받아 세계기자대회(World Journalist Conference, WJC) 연사로서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한국에 오기 전 한반도의 정치, 경제 발전에 대해 공부하면서 첨단기술을 추구하는 삼성에 대해서 깊은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한국에서의 일주일 동안 한국인들은 필자를 존중해줬고 나 역시 그들과의 교류가 즐거웠다. 역사박물관, 진관사, 새만금 방조제, 창경궁, 부산 누리마루 등을 다니며 한국이 어떻게 전세계 관광객들을 매료시켰는지 직접 느낄 수 있었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여러 명소를 방문했는데,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 ‘삼성디지털시티’다.
필자는 핀란드의 노키아 본사를 방문한 적이 있었기에, 갤럭시폰이 탄생한 수원에서도 그때와 비슷한 체험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삼성디지털시티와 마주한 순간 내 생각이 짧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삼성디지털시티는 세계 최고의 두뇌들이 집단 사고를 통해 한계를 뛰어넘고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하나의 도시’와 같았기 때문이다.
‘이 도시’에는 390에이커의 사무공간과 38층 높이의 랜드마크 오피스 타워 4곳, 실험실·사무실·레크리에이션 시설 등을 갖춘 131개 건물에서 3만5000명의 직원들이 함께 호흡하고 있다. 삼성디지털시티는 ‘시티’라는 명칭에 걸맞게 연구원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뿐만 아니라 농구 코트 10곳, 배드민턴 코트 4곳, 축구장 3곳, 야구장 2곳 등 직원들의 편의시설도 품고 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150명 이상의 선생님들이 1000명에 달하는 아이들을 돌보는 교육기관도 있어 삼성 임직원들은 자녀 걱정 없이 안심하고 업무에 매진할 수 있다고 한다.
삼성 뉴스룸에 따르면 엔지니어, 개발자, 디자이너 등의 직군은 효율성과 생산성을 위해 오후 6시 이전에 언제든지 출근할 수 있다. 삼성은 이를 ‘스마트 워크’라고 부르는데, 창의적인 환경이 있었기에 창의적인 결과물이 탄생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WJC 참가단은 삼성 측의 브리핑 후, 삼성혁신박물관으로 향했다. ‘과거가 없으면 미래도 없다’는 말처럼 삼성혁신박물관은 지난 270년 동안 전세계 전자기기 산업이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이 곳에선 삼성전자의 옛 가전제품들이 전시돼 있었는데, 영화 <매트릭스>를 위해 특별히 디자인된 전화기가 유독 눈에 띄었다. 당시 기자단은 최첨단 기술 시연회도 접했는데, 기업의 역동적인 문화가 기술에 잘 녹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삼성전자는 올해 10월 20일 글로벌 브랜드 컨설팅 업체 ‘인터브랜드’가 발표한 ‘베스트 글로벌 브랜드 2020’에서 기업의 역대 최대 브랜드 가치인 623억 달러를 기록하며 5위에 오른 바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야기한 험난한 경영환경에도 불구하고 브랜드 가치가 2%P 상승하며 2000년 43위를 기록한 이후 20년 만에 글로벌 톱5로 성장한 것이다. 갤럭시 폴드, 비스포크 냉장고 등 혁신제품을 지속적으로 출시해오는 동시에 인공지능(AI), 5G, 사물인터넷(IoT) 등의 최첨단 기술을 선도해 왔기에 가능한 일이다.
삼성이란 기업이 일궈낸 성과들을 바라보며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삼성이 오늘날의 글로벌 기업으로 급성장한 배경에는 누가 있을까? 삼성은 1938년 3월 1일 이건희 회장의 아버지 이병철 전 창립회장이 과일과 건어물을 판매하기 위해 설립한 기업으로, 훗날 조선, 반도체 등으로 사업분야를 넓혀가기 전엔 섬유, 설탕, 기타 소비재 등에 초점을 맞췄었다.
한국은 20세기 후반 뒤늦게 산업화에 뛰어들 당시만 해도 타국의 기술을 모방한다는 평가를 받았고, 이를 극복하고자 국가 차원에서 고군분투 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삼성은 한국의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기업이었지만 세계 무대에선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1987년 창업주인 이병철 전 회장이 별세한 이후 이건희 회장은 45세의 나이로 그 뒤를 이었다. 그는 취임 즉시 직원들의 사고방식을 바꾸고 나섰다. 경영진과의 만남에서 밝힌 “아내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명언은 삼성을 글로벌 비즈니스 리더로 이끌었고, 다른 한국 기업들의 해외진출에 강한 동기를 부여했다.
이건희 회장의 경영철학을 잘 드러내는 또다른 사례도 있다. 1995년 경북 구미의 삼성전자 공장을 방문한 이건희 회장은 한 켠에 쌓여있던 불량 전자제품을 불태우라고 지시했다. 당시 이 회장은 ‘품질은 내 자존심’이라는 문구가 쓰여있는 현수막 아래에서 15만대의 휴대폰이 불타는 것을 지켜봤다. 이 회장은 이를 통해 직원들에게 ‘양보다 질’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건희 회장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유산은 여럿 남아있다. 이 회장은 혁신을 통해 세계 초일류를 추구해왔기에 삼성은 지금의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다. 한 기업의 발전은 기업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이건희 회장이 30년도 전에 경고했듯,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하는 정부와 정치인은 기업의 성장을 지연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발전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해야만 한다.
이건희 회장의 빈 자리가 크게 느껴질 수 있다. 그의 혁신가 정신은 후대에 계승 발전되어야 한다. 번역 송재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