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40주년 기획전’ 화가 김근태와 장애인의 인권

김근태 화백이 자신의 작품에 서있다

[아시아엔=오준 세이브더칠드런 이사장, 전 장애인권리협약 의장, 전 유엔대사] 김근태 화백을 실제로 만나기 전에 그의 그림을 먼저 보았다. 2015년 봄, 필자가 유엔 대사로 뉴욕에 근무하면서 장애인권리협약 의장 역할을 맡게 되었을 때다.

함께 일하는 담당관이 우리나라 목포에서 활동하는 화가 한 분이 지적장애인들을 작품으로 그리는데, 유엔에서 전시하고 싶다는 연락을 해왔지만 적절한 계기를 찾기 어려웠다고 한다. 마침 장애인권리협약 의장직을 맡게 되었으니 한번 검토해 보면 어떻겠냐는 말이었다.

필자는 학창 시절 내내 미술반 활동을 해서 그림을 좋아하기 때문에, 우선 어떤 그림인지 보고 싶다고 했다. 요즈음은 김 화백의 작품이 점점 더 비구상에 가까워지고 있지만, 2015년에 본 그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지적장애 아동의 얼굴을 크고 밝게 주관적으로 묘사한 것이었다.

지나치게 의도를 앞세워 예술성이 결여된 작품이면 어떡하나 우려한 것이 무색하게 인상적이었다. 작품의 색조 톤도 인상주의 작품에 익숙한 국제 관객들에게 공감을 많이 줄 것으로 보였다. 우리 대표부와 유엔 사무국의 검토를 거쳐 그해 12월 3일 세계장애인의날 유엔 로비에서 전시회가 열렸다.

그때 처음 만난 김 화백과의 인연이 시작되었고, 필자가 2017년 외교관 생활을 마친 후 장애인 인권을 다루는 사회단체들과도 일하게 되면서 함께 할 기회가 계속되었다.

1980년 광주민주화 운동 당시 대학생 시민군으로 총을 잡았다가 살아남은 트라우마와 방황, 그리고 우연히 지적장애 아동들을 만나 작품의 대상으로 구원을 얻게 된 김 화백의 이야기는 이제 잘 알려져 있다.

5월 13일부터 광주 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리는 5·18민주화운동 40주년 김근태 기획전으로 더욱 부각될 것이다. 그의 인생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된 젊은 시절 경험한 삶과 죽음의 트라우마, 즉 심리적 외상은 직접 경험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에게도 큰 공감을 준다. 하지만, 왜 지적장애 아동의 얼굴 속에서 그는 구원을 찾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브루겔 그림. 16세기 네덜란드 화가인 피터 브루겔은 처음으로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그림을 남겼다. 

미술의 역사에서 예술가 자신이 장애가 있던 경우는 드물지 않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장애인 화가 툴루즈 로트렉은 잘 알려져 있고, 앙리 마티스도 마지막 14년을 휠체어에서 생활하였다.

김 화백이 점점 더 추상적인 작품을 만드는 이유도 시력의 악화가 원인 중의 하나다. 하지만, 장애인을 예술작품의 대상으로 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16세기 네덜란드 화가 피터 브루겔이 처음으로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그림을 남겨서 유명해졌는데, 작품 의도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을 낳았다.

귀족이 아닌 농민들을 묘사한 것만도 선구적이라고 할 수 있던 시대에, 지체장애인과 시각장애인을 작품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장애인 차별에 대한 사회적 메시지를 주려고 했음은 틀림 없는 것 같다.

김 화백은 여러 인터뷰에서 “지적장애 아이들의 얼굴이 ‘인간의 참된 얼굴’임을 발견하고 거기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장애인 인권에 관한 의식이 부족하던 시절 우리는 지적장애 아동을 ‘저능아’라고 불렀다.

왜 그들의 얼굴이 인간의 참된 얼굴인가? 이렇게 생각해 보자. 우리가 거리를 걷거나 건물에 들어설 때 예상하지 못한 곳에 거울이 있는 걸 발견할 때가 있다. 거울에 비춰진 모습이 자기인데도 모르고 보다가 “아, 내 모습이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얼굴에 일부러 표정을 짓지 않고 있으면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보게 된다. 왜냐하면 보통 거울에 다가가거나 사진을 찍을 때는 누구나 의식하고 표정을 짓게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아이들 특히 지적장애 아이들은 남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지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표정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남을 의식하지 않는 모습이 김 화백이 말한 ‘인간 본연의 얼굴’인지도 모른다.

세계 장애인권리협약이 전파하는 핵심요소는 ‘장애인의 동등한 사회 참여’에 있다. 쉽게 예를 들자면, 장애인 전용의 영화관을 만들자는 게 아니고, 모든 영화관에 장애인이 편리하게 가서 비장애인과 함께 영화를 볼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휠체어 진입로가 있어야 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막도 필요하다. 즉 사회적 비용이 든다.

사회가 비용을 기꺼이 감당하려면, 장애인이 나와 무관한 ‘남’이 아니고 ‘우리’의 일부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단순히 예산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인식의 문제이기 때문에, 투쟁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 권리 옹호와 인식 변화가 중요하다.

김근태 화백의 장애아동 작품은 그런 뜻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그의 그림에 표현된 밝고 천진한 장애아동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그들과 함께 하게 되고 그 아이들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확인하게 해준다. 결국 모든 아름다움은 우리의 보는 눈 속에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