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마약…2차대전땐 필로폰으로 ‘무기증산’, 요즘은 야쿠자가 ‘주범’

2013년 5월 인천지검·인천본부세관 합동수사반이 일본인 2명을 붙잡아 구속 기소했다. 이들은 홍콩 마카오에서 인천국제공항으로 필로폰 6.24㎏(시가 208억원 상당)을 가지고 들어와 일본으로 밀반출하려 한 혐의였다. 사진은 인천지검 브리핑 모습 <사진 연합뉴스>

[아시아엔=김중겸 치안발전포럼 이사장, 인터폴 전 부총재] 아시아와 중동에는 오랜 역사 지닌 양귀비 재배지대가 있다. 타이-미얀마-라오스 접경지대 황금삼각지대(Golden Triangle)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이다.

1960년대 미국의 히피들은 베트남전쟁 반대한 주로 살만한 집 자제들이었다. 징병기피자와 탈영병 많았다.

인도로 몰려갔다. 그곳에서 마리화나는 풀이었다. 지천에 널려 있었다. 예로부터 민간요법 건강식품이었다. 이걸 피우며 명상과 요가 한다고 머리 주렁주렁 늘리고는 자세 잡았다. 귀국해 마약에 취해 프리섹스 즐겼다. 하위문화(subculture) 되어 퍼져나갔다.

살기 어려웠던 중남미 사람들. 어라, 저 돈 많은 미국 청소년들 drug에 미쳐 나가는구나, 코카인으로 돈 벌겠구나!

당초에는 먹고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돈맛 알자 직업 됐다. 금상첨화로 히피들 덕분에 아메리카에 암시장 유통망 구축됐다. 마약카르텔 들어섰다.

1971년 6월 18일 미 닉슨대통령이 마약과의 전쟁(War on Drugs) 선포했다. 이미 실기失期. 결국 실패. 오늘도 머리 싸매고 있다.

일본은 필로폰으로 무기증산

일본.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 무기와 탄약 부족했다. 남정네들은 다 전장에 나갔다. 남아 있던 노인, 부녀자, 청소년이 근로동원돼 군수공장에 투입됐다. 조선과 대만과 청에서도 징용당해 끌려갔다.

그래도 탱크 부족했다. 군함 더 필요했다. 졸지 않는 노동력, 긴장하며 일하는 노무자 필요했다. 무슨 방법으로? 그렇다! 필로폰이다! 배급하자!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제약회사들이 뛰어들었다. 국가가 시행하는 국책사업이다. 이 기회에 돈 벌자. 애국도 하자. 공장 풀가동 중독자 양산됐다.

홍콩, 동남아시아, 남태평양 지역을 점령해 통치했던 남방군정南方軍政은 연간 예산의 절반을 아편수입으로 채웠다. 전매專賣 사업이었다.

1945년 패전 후 중단. 사용자들은 공급 끊어지자 금단현상에 시달렸다. 이 틈을 야쿠자가 파고들었다. 필로폰 암시장 장사에 나섰다.

제조과정에서 악취가 심하게 났다. 주민 신고->적발 위험성 컸다. 자체제조 최소화. 대부분 한국과 대만에서 밀수입했다.

야쿠자의 본업은 원래 ①업소에서 보호비 뜯기 ②협박과 공갈 ③ 도박 ➃매춘이었다. 마약밀매가 이 수익 가볍게 뛰어넘었다.

1950년대 필로폰이 사회 깊숙이 퍼졌다. 더불어 수면제와 진통제 남용이 극성이었다. 대대적 단속에 들어갔다.

1960년대 청소년 사이에서 환각제 유행했다. 신나, 본드, 톨류엔 흡입하고 길거리에 널브러졌다. 도둑질하고 패싸움했다.

폭주족. 들이마시고 취했다. 선량한 사람들이 내일 위해 잠자야 하는 한밤중 무리지어 오토바이 탔다. 굉음 내며 거리를 달렸다.

요즘 일본의 마약정세

마약단속기관은 마약사범 잡아들이는 경찰청과 후생성 마약단속부, 그리고 밀수 걸러내는 관세청의 세 기관이 있다.

후생성이 이 셋의 실적을 총괄해 관리한다. 2019년도 마약사범은 1만4019명. 2010년 1만4965명 이래 1만4000명 선에서 움직이고 있다.

내역별로는 역시 전통의 필로폰이 1위를 고수한다. 1만284명으로 73.4%. 다음은 대마 3218명으로 23.0%. 대마사범의 50.8%인 1634명이 10대~20대다. 대마는 마약의 길로 들어서는 입문용 제품(gateway drug)이다.

여기서 맛 들이면 어디로 가는가. 환각성과 중독성이 더 강한 헤로인과 코카인으로 간다. 일본마약 정세의 심각성 보여주는 대목이다.

필로폰사범은 역시 야쿠자. “어이! ‘샤부’(필로폰) 필요해?” 하며 판다. 그들이 전체의 46.5%로 4796명이다.

그러면 세계에 마약을 사회의 병리현상으로 등장시킨 것은 누구인가? 영국정부다. 중국과의 수출에 적자 면치 못하자 이를 메우기 위해 저들로서는 근사한 정책을 생각해 낸 것이다.

식민지 인도에 아편이 있었다. 인도인들 쥐어짰다. 대량으로 수집했다. 중국에 가져갔다. 차茶와 바꿨다. 중국인 4천만명이 피웠다. 2천만명이 중독자 됐다. 중국으로서는 당연히 수출중지를 영국에 요청했다.

이를 무시했다. 아편을 몰수하자 전쟁 일으켰다. 적반하장, 아편전쟁이다. 1840년과 1856년 두번 일어났다. 청淸이 졌다. 아편 물밀 듯 들어갔다.

영국 무역수지는 엄청난 흑자. 돈 관리할 은행도 만들었다. 지금도 버젓하게 영업하는 HSBC(홍콩상하이은행)이다. 돈은 과거 묻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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