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델라의 ‘아즈위’···”코로나19, 이 또한 지나가리라”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코로나19로 구조조정 칼바람이 산업계에 불어 닥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일고 있다. 실제로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은 항공·유통업계뿐만 아니라 조선업·중공업·정유·자동차 등 산업계 전반에서는 최근 휴직과 희망퇴직 이 잇따르는 등 감원 한파가 불어 닥치고 있다.
필자의 둘째 딸애가 지금 아시아나항공 팀장으로 근무 중이다. IMF 사태 때도 회사를 못나가고 다른 회사에서 일한 경험이 있었다. 그런데 그 후 처음으로 아시아나항공은 전 직원 대상 10일 이상의 무급휴직을 실시하기로 해, 현재 딸애도 집에서 엄마와 아내생활을 톡톡히 하고 있는 중이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현재로서는 유·무급 휴직 정도에 그치지만,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면 구조조정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한다. 참으로 큰일이다. 전 산업이 절망의 나락(奈落)으로 떨어지지 않을까 심히 걱정이다.
희망(希望)이란 말을 구성하고 있는 두 글자 중 ‘희(希)’라는 글자는 점괘를 가리키는 육효(六爻)의 ‘효(爻)’와 수건을 뜻하는 ‘건(巾)’이 합쳐진 글자다. 앞으로의 운수를 알려줄 점괘를 수건이 가리고 있는 형국이므로 점괘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앞날에 대한 기대를 가지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망(望)’ 자는 바깥에 나가고 없는 사람이 돌아오기를 달을 바라보며 기원한다는 의미가 있다.
판도라의 상자에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것이 ‘희망’이라고 한다. 그래서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더라도 인간은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절망이나 포기보다 훨씬 낫다. 역경의 상황이라도 희망을 가지고 뭔가를 해나가면, 낮은 확률이라고는 해도 어쨌든 잘 풀릴 가능성이 있다.
1964년 종신형을 선고받고 절해의 고도(孤島) 루벤섬 감옥에 투옥 된 사람이 있었다. 감옥은 다리 뻗고 제대로 누울 수조차 없을 정도로 좁았으며, 찌그러진 양동이 하나를 변기로 쓰라고 감방 구석에 던져주었다. 면회와 편지는 6개월에 한번 정도만 허락되었으며 간수(看守)들은 걸핏하면 끌어다가 고문하고 짓밟고 폭력을 가했다.
이미 사람으로서의 품격과 지위는 상실되었고, 견딜 수 없는 모욕과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가 감옥에 끌려간 후 그의 아내와 자녀들은 살던 집을 빼앗기고 흑인들이 모여 사는 변두리 땅으로 쫓겨났다.
감옥살이 4년 되던 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 이듬해 큰 아들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장례식에도 참석할 수가 없었다. 세월이 흘러 감옥살이 14년이 되던 해에 큰 딸이 결혼을 해서 아기를 데리고 할아버지에게 면회를 왔다.
큰 딸이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아기의 이름을 지어주세요.” 아버지는 말없이 땟물이 찌들은 윗주머니에서 꼬깃꼬깃 꾸겨진 종이쪽지 하나를 꺼내어 딸에게 건네주었다. 딸은 그 종이쪽지에 쓰인 글자를 보는 순간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글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아즈위’(Azwie), 바로 ‘희망’이라는 글자였다.
그는 그후로 온갖 치욕을 다 당하면서 13년간이나 옥살이를 더 하고 나서야 마침내 풀려나게 되었다. 1964년부터 1990년까지 무려 27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44세에 억울한 감옥살이를 시작해서 71세에 풀려난 것이다. 그는 남아공 흑백분리 정책을 철폐하고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에 당선된 넬슨 만델라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되어 자기를 박해하고 고통과 치욕을 주었던 정적들을 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인간의 고고한 삶의 방식을 보여주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세계언론은 이를 가리켜 인간의 품격을 한 단계 올려놓은 사람이라고 존경을 바쳤다.
오랜 세월 어떻게 절망의 세월을 견디어낼 수 있었을까?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위대한 변화가 반드시 일어나리라는 ‘아즈위’(희망)를 한 순간도 포기한 적이 없다.” 사람이 죽는 것은 힘이 들어서가 아니라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희망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며칠 전에는 어느 택배기사가 과로로 유명을 달리했다. 어디 그뿐인가? 연극배우들은 공연은커녕 자리가 없어 알바도 못한다고 한다. 절망의 심연으로 빠져 숨이 멈추는 것 같다고 호소하는 말을 라디오를 통해 들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아즈위가 있다. 머잖아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