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남도 유관순’ 윤형숙을 아십니까?···3.1만세시위 중 왼팔 잘린 채 ‘초인적 항거’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여수’ 하면 2012년 여수엑스포와 1948년 여순사건 정도를 떠올린다. 60여 년 간격을 두고 일어난 두 사건은 대한민국의 현재와 과거를 상징적으로 웅변한다. 그런데 또 다른 큰 인물이 여수을 맺고 있다. 바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다.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 본영인 여수에 머물며 왜란 극복의 대업을 이룬 사실은 의외로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이순신 장군이 어머니 변씨와 부인 방씨를 여수 웅천 송현마을에 모신 이야기는 엄연한 사실(史實)이다. 이순신의 어머니가 거주했던 곳이라 하여 이순신 장군 자당기거지(慈堂起居地)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이순신 장군의 위국헌신 정신을 이어받은 까닭일까? 여수는 이순신 사후 400여 년 뒤 항일의병을 포함한 걸출한 독립운동 지사를 여럿 배출했다. 그 가운데 한 분이 윤형숙 열사다. 윤 열사는 광주 수피아여학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10일 광주시내에서 만세시위에 나선 1000여 군중 앞에 서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했다.
일본 헌병은 해산명령을 내리고, 이에 불응하는 군중을 향해 공포를 쏘며 진압했다. 하지만 윤 열사는 이에 굴하지 않고 맹렬히 행진해 나갔다. 이때 일본 헌병이 열사의 왼팔을 군도(軍刀)로 내리쳤다. 쓰러진 열사는 유혈이 낭자한 바닥에서 태극기를 주워 들고 일어나 더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 의롭고도 장한 광경을 본 군중은 비분강개하여 더욱 격렬히 시위를 계속하였다.
당시 왼팔 상박이 절단되고 오른쪽 눈을 실명한 열사는 체포돼 일제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4월형을 선고 받고, 부상치료 등을 위해 군병원으로 추정되는 시설에 수년간 유폐되었다. 이후 열사는 장애의 몸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며 문맹퇴치운동을 통한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한편으론 기독교 전도사로서 선교활동을 벌이다 6.25전쟁 중 서울수복일인 1950년 9월 28일 퇴각하는 인민군에 붙잡혀 여수 미평 소재 과수원에서 손양원 목사 등과 함께 처형당했다. 그때 나이 만 50살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윤형숙 열사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려 2004년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윤형숙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은 공적 포상뿐 아니라 ‘남도의 유관순’이라는 수식어로 쌓여가고 있다.
하지만 항일운동가들의 희생으로 오늘의 번영과 자유를 누리고 있는 우리들이 몫을 다했다고 할 수 있을까?
때마침 여수시가 ‘의혈지사(義血志士) 윤형숙을 기억한다’를 주제로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와 추모제를 여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여수시(시장 권오봉)와 여수지역독립운동가유족회(회장 오룡)이 주최·주관하고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위원장 이종찬) 후원하는 이번 행사는 오는 9월 27일 오후 2~6시 여수시청 내 여수문화홀과 윤형숙 열사 묘소에서 열린다.
여수에서 지역 출신 독립유공자에 관해 학문적으로 집중 규명하는 세미나가 열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학술세미나에선 한규무 광주대 교수가 ‘의혈지사 윤형숙의 삶과 항일투쟁’을, 김호욱 광신대 교수가 ‘일제강점기 호남 기독교 선교와 윤형숙의 항일운동’에 대해 각각 주제발표를 한다. 토론에는 김인덕 청암대 교수, 김병호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윤치홍 여수지역독립운동가유족회 독립유공자발굴위원장 등이 참여한다.